홍익사대부고 펜싱부의 소년 검객들이 찌르기 동작 시범을 보이고 있다. 홍익사대부고 펜싱부는 1957년 창단해 많은 국가대표 선수와 지도자를 배출하며 한국 펜싱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이태경 객원기자)

“펜싱 선수 가운데 제 영웅을 꼽아보라고요? 그야 당근 쾌걸 조로죠.”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 검객들은 명랑하면서도 진지했다. 서울 성북동 산자락에 자리잡은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이하 홍익사대부고) 펜싱체육관. 얼굴에 보호 마스크를 쓰고 흰색 상하의 펜싱복을 차려 입은 소년 검객들이 검을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일었다. 예사로운 칼 솜씨가 아니다.

국가대표 상비군인 정재규와 서정민(이상 3학년)은 플뢰레 종목에서 고교 1, 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파. 펜싱은 유효 공격 부위와 방법에 따라 플뢰레(몸통 찌르기)와 에페(전신 찌르기), 사브르(상체 찌르기와 베기) 등 세 종목으로 나뉜다.

주장인 서정민은 “펜싱이 좋아서 하기 때문에 훈련이 힘들지는 않다”며 “선생님들처럼 국가대표로 활약한 뒤에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정재규는 “어렸을 때 몸이 약해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상대의 생각을 미리 읽고 역이용하는 펜싱의 즐거움에 중독됐다”며 펜싱 예찬론을 폈다.

선배가 가르치고, 후배가 다시 스승이 돼 후배들을 가르치는 전통이 바로 홍익사대부고 펜싱의 힘. 김형렬(35) 코치와 정진만(33) 코치는 모두 이 학교 출신으로 국가대표로서 아시아챔피언에 올랐던 고수들이다. 김 코치와 정 코치는 “저희들 학창 시절에도 국가대표 선배들이 해외 대회를 마치면 학교로 찾아와 외국서 배운 신기술을 가르칠 정도로 열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홍익사대부고는 1947년 창설된 조선펜싱연맹의 뒤를 이은 대한펜싱협회가 1956년 재조직된 뒤 1년 만에 펜싱부 문을 열었다. 당시 홍익사대부고의 교명은 성북고. 신입생 이근배(65·현 한국대학펜싱연맹 회장)는 서울 을지로에 자리잡은 한국체육관에서 펜싱을 배워, 동급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고교 펜싱부를 만들었다.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장비들을 한국체육관에서 매일 빌려 쓰고 돌려주는 어려운 훈련 환경이었지만, 당시에도 조로에 ‘미친’ 펜싱부원들은 나날이 늘었다고 한다.

이근배 회장은 “당시 쾌걸 조로와 삼총사 영화가 큰 인기를 끌던 때였다”며 “한국 펜싱의 선구자인 김창환 선생이 한국체육관에서 펜싱을 가르치자 70여명이 몰려들었다”고 회고했다. 이를 계기로 다른 학교들도 경쟁적으로 팀을 창단하기 시작했다.

홍익사대부고는 전국체전 9연패, 중고연맹전 11연패 등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숱한 국가대표를 배출했다.

1988년부터 13년간 홍익사대부고 펜싱부를 지도했던 서범석 경륜운영본부 감독은 “제 재직시절에만 전국대회에서 100회 이상 우승을 차지해 트로피와 우승기를 갖다 놓을 장소가 마땅치 않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현재 남자 펜싱 국가대표인 원우영과 김정환, 최병철도 이 학교 출신이다. 배봉춘 교장은 “재정적인 지원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한국 펜싱을 개척한 학교로서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여자 고수는 성남여고·춘천여고

성남여고는 한국 펜싱 사상 처음으로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남현희를 배출한 강호이며, 춘천여고도 전통과 실력을 자랑한다. 남자고교에서는 원주고와 대구 오성고,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영호가 나온 충남기계공고 등도 펜싱 명문으로 꼽힌다.






▲ 펜싱명문 홍익고 학생들의 연습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