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스콧 버거슨 문화평론가(J. Scott Burgeson)

작년에 나는 홍익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책을 쓰느라 정신 없이 일했다. 2년 넘게 휴가다운 휴가를 못 가서, 겨울 방학을 이용해 2월 한 달간 중국 동북부에 머물며 조선족 연구도 하고, 여행도 즐기기로 했다.

때는 1월 말이었다. 여행을 가려면 여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거래하는 하나은행 종로지점에 가서 국제현금카드를 발급해달라고 했다. 신용카드와 달리, 현금카드는 자기 계좌에 들어있는 돈을 꺼내 쓰는 기능만 있는 간단한 카드다. 한 달이나 외국을 여행하면서 여비를 현금으로 들고 다닐 순 없다.

걱정이 되긴 됐다. 외국인인 내가 과연 이 카드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시중은행이 2년 전부터 별안간 외국인에겐 국제현금카드를 내주지 않는다”는 불평을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찾아간 지점에서는 직원이 친절히 “서류만 써내면 2~3일 안에 카드를 내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안심한지 딱 이틀 뒤, 나는 같은 직원에게 “미안하지만 외국인은 안 된다”는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찾아가서 왜냐고 물었다.

“나는 멀쩡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고, 합법적으로 일해서 돈을 벌었으니까 내 계좌에 접속할 권리가 있어요. 안 그래요?”

은행 직원은 내 말이 맞다며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도대체 왜 외국인은 안 되는지 이유를 설명하진 못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현금 200만원을 여행자 수표로 바꿔서 중국에 가져갔다. 여행 내내 수표를 간수하고 현금으로 바꿔 쓰느라 고생이 막심했다. 중국 은행이 모두 문을 닫는 설 연휴에 특히 그랬다.

올여름 나는 다시 해외에 나갈 계획이지만, 그 고생을 또 하긴 싫다. 그래서 나는 국민·외환·우리·신한·SC제일 등 시중은행 여섯 곳을 돌아다니며 국제현금카드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다들 “외국인은 이제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다 달랐다. “은행 차원에서 결정한 일”이라는 곳도 있고, “정부 규제 때문”이라는 곳도 있었다. “외국인은 한국에 있을 때만 한국의 은행을 이용하니까 카드를 안 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사람도 있었다.

된다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놀랍게도 종로 지점에선 “안 된다”던 하나은행이 을지로 지점에선 “즉시 발급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나는 5분 만에 카드를 받았다. 좋긴 한데 황당했다.

나는 외국인에게 국제현금카드를 내주지 말라는 규제가 정말 있는지 재정경제부에 물어봤다. 담당 직원은 나만큼 당혹스러워 했다. “그런 규제 없는데요. 시중은행이 오해했든지, 그저 핑계든지 둘 중 하나예요.”

이 얘기의 교훈이 뭐냐고? 많은 한국 시중은행이 무능하거나, 외국인 차별을 하거나 둘 중 하나란 소리다. 한국은 말로만 ‘세계화’를 떠들고 있다. 한번 이런 일을 겪은 외국인들은 “한국이 아시아의 허브가 되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치게 된다.

나는 싱가포르·중국 베이징·태국 방콕·일본 교토·호주 시드니·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내 친구들에게 이 문제를 털어놨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각각의 나라에서 외국인 신분이지만, 현지 은행에서 국제현금카드를 받아서 해외 여행 중에도 불편 없이 쓰고 있다.

캐나다인 친구 덕은 작년까지 서울에서 일하다 베이징으로 이사 갔다. 덕은 수년 전에 외환은행에서 국제현금카드를 받았는데, 작년에 그걸 들고 방콕에 여행 갔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카드가 정지된 걸 알고 기겁을 했다. 이런 외국인 차별에 그는 “질렸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또 다른 친구 데이브가 잘 하는 소리가 있다. “이 나라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라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