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슬치기’ 기계로 재벌 된 한국인 

세계적인 경제지 포브스(Forbes) 일본판(7월호)은 '일본의 억만장자(日本の億万長者)'라는 커버 스토리로 일본의 부호들을 소개했다. 1위는 일본의 인터넷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계 손정의(50·孫正義) 소프트뱅크 사장. 지난해 9위였던 손 사장은 6960억엔(약 5조2924억원)으로 1위를 차지했다.

포브스지가 거명한 일본 대부호들 중에는 '한국 이름'이 하나 더 있다. 1320억엔(약 1조37억원)으로 22위에 오른 한창우(77·韓昌祐) 마루한 회장이다. '파친코 황제'로 불리는 한창우 회장은 손정의 사장과 함께 일본의 30대 부호에 3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어떻게 '구슬치기' 기계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재벌이 될 수 있었을까? 기자는 인터넷에서 마루한의 웹사이트를 찾고,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교환원을 통해 한 회장을 찾았다. 그의 일본인 비서는 "해외 출장 중"이라고 했다. 며칠 뒤 한국에 있는 그의 지인을 통해 한국에 잠시 다녀갈 예정이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난 1조원을 가진 거부(巨富)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노신사였다.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었지만, 꼿꼿한 자세와 걸음걸이 등 환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어지간한 중소기업 회장들도 데리고 다니는 수행 비서나 보디가드도 없었다.

"손정의씨와는 제가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다 보니 그렇게 뽑힌 것뿐이지요. 여기서 만족할 수도 없고. 초심이라 그럴까. 지금도 저희 회사는 챌린지(challenge) 정신과 헝그리(hungry) 정신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 회장은 겸양의 미덕으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곧바로 자신감에 찬 어조로 바뀌었다.

“사실 포브스가 작년 자료를 갖고 해서…. 작년엔 260억엔의 경상이익이 났는데, 올해 실적은 322억엔이거든요. 금년 실적으로 했으면 (랭킹이) 엄청 올라갔을 텐데….”

한회장이 세우고 키워온 마루한(マルハン)은 파친코(パチンコ) 회사다. 1년 매출이 1조8600억엔. 일본 전역에 220개 점포가 있고, 파친코 기계가 13만여 대, 종업원이 1만 명이나 된다. 이 밖에 상장 건설사의 주식 인수를 통한 경영권 확보를 비롯해 외식사업, 볼링장, 골프장, 해외개발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한 회장은 “이젠 동남아 개발에 눈을 돌리는 중”이라며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그룹으로 키우는 게 앞으로의 꿈”이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 시작돼 세계에 퍼진 것이 ‘컵라면’과 ‘가라오케’인데, 이제 파친코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회사 이름 마루한은 합성어다. 동그란 구슬이란 뜻의 마루(丸)와 한창우 회장의 성씨인 한(韓)을 합쳤다. “파친코의 구슬, 볼링과 골프의 공도 다 동그롬하고(동그랗고), 지구도 그렇고…. 또 원만하다고 할 때도 둥글둥글하다고 하지요. 거기에 내 성인 한을 붙였죠.”

지난 2005년 6월22일 한 회장은 일본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도쿄 인근 지바(千葉)의 마쿠하리(幕張)에 있는 대형 컨벤션홀에서 9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마루한의 매출 1조엔 돌파행사를 개최한 것. 650개의 식사 테이블을 놓기 위해 대연회장 3개를 허물었고,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만 1500명이 동원됐다. 도쿄 필 하모니의 축하연주와 풀 코스 프랑스 요리가 제공됐다. 행사 비용만 15억엔(당시 150억원 수준)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마루한의 파워’라고 보도했다.

“회사가 전국에 흩어져 있으니까 종업원들이 회사 파워를 잘 몰라요.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거죠.”

당시 행사는 회사 매출 1조엔 돌파와 함께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2005년은 바로 한창우 회장이 일본으로 밀항한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 '콘사이스 사전' 달랑 들고 일본으로 

한 회장의 고향은 경남 사천이다. 그는 사천이라는 행정상 지명 대신 삼천포라는 옛 지명을 계속 사용했다. 1930년 12월17일 한창우 회장은 한정수씨와 양건이씨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300평을 빌려 짓는 농사만으로는 먹고 살기 빠듯했던 소작농 아버지는 출생신고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일본 순사(경찰)의 재촉에 못 이겨 석 달 뒤에야 신고를 했다. 호적상 생일은 1931년 2월15일이 됐다.

히노데(日出)소학교(삼천포초등학교의 전신)에서 줄곧 1등을 하던 한 회장은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정미소에서 급사로 일했다. 동네 읍장이 돈을 대준 덕에 1년 뒤인 1944년 삼천포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는 학교에서 발생한 시위의 주동자로 몰렸다. 학비를 대줬던 읍장이 좌익이었고, 그는 남로당 하부조직의 간부로 분류됐던 것이다.

"당시 우익 청년들이 '다 잡아 죽인다'고 돌아다닐 때였어요. 중학교 1학년짜리가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어떻게 압니까. 마침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에 정착했던 큰 형의 권유도 있고 해서 1945년 10월21일 밤에 밀항선을 탔지요."

소년 한창우는 '콘사이스(英日사전)'와 쌀 두 되만 달랑 들고 밀항선에 올랐다. 3시간이면 도착한다던 밀항선은 하루가 꼬박 지난 뒤에야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얼마 전에 북조선(북한) 사람들이 목선을 타고 탈북한 게 보도됐지요? 그걸 보니 옛날 생각나더군요. 그때 얼마나 멀미가 나던지. 배에서 내려서도 한참 바닥에 쓰러져서 쩔쩔 맸어요. 어찌 보면 내가 '보트 피플' 1세대지요."

"한국에서는 가난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일본에서는 꼭 공부를 해서 성공하겠다"던 소년이 가슴에 품고 있던 콘사이스는 한 회장의 '보물 1호'로 남아 있다.

한 회장은 시모노세키에서 석탄열차를 타고 도쿄 인근의 이바라키현에서 살던 형을 찾아갔다. 하지만 형도 동생을 챙겨줄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한 회장은 교포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도쿄 조선장학회에서 시험을 쳐서 고교 졸업과 대입 시험 자격을 얻었다. 도쿄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재일교포 단체 사무실의 일을 봐주면서 숙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카베쓰(캐비지·양배추)랑 쌀, 된장을 물에 넣고 끓여 먹었어요. 그게 뭐 맛이 있겠어. 그나마 곤로에 얹어 놓고 공부를 하다가 잊어버려서 다 태워 먹은 적도 많아요. 한국에선 내가 마라손(마라톤)도 제법 했는데, 일본에 와선 통 못 뛰겠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영양실조인기라.”

1952년 대학을 졸업한 한창우는 한국으로 돌아갈 꿈을 아예 접은 상태였다. 그는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까지 치르는 한국의 상황이 싫었다”고 했다. 대학 시절 그는 당시 일본 사회에 유행에 따라 마르크스 경제학에 빠져 있었다. 한 회장은 “그 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공부하고 영어 실력을 제대로 쌓았더라면 지금 실무적으로 엄청난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그게 제일 후회스럽다”고 했다.

# 26살에 자형이 운영하던 파친코 맡아 

대학은 졸업했지만, 그는 백수였다. 한 회장은 교토 근처 소도시 미네야마(峰山)에서 파친코 점포를 운영하던 자형을 찾아가 종업원으로 일했다. 한 회장이 파친코와 첫 인연을 맺은 때다.

파친코 기계 20대를 놓고 운영하던 자형의 점포는 근처에 기계 60대를 둔 새로운 파친코가 생기자 손님이 뚝 끊겼다. 자형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며 점포를 매물로 내놓았다. 하지만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내가 제안을 했죠. '점포를 날 주세요. 지금 돈이 없지만, 성공시켜 가지고 두 배로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자형은 '이 자식이 뭔 소리하고 있나'하고 생각했겠지만, 방법이 없었지요."

결국 자형은 한 회장에게 점포를 맡기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26살 청년이 운영하는 파친코는 '꾼'들에겐 '밥'이었다. 초반 운영은 '꾼'들에게 털리는 바람에 적자였다. 하지만, "저기 젊은 시로도(しろうと·풋내기)가 운영하는 점포에 가면 잘 터진다"는 소문이 나면서 오히려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또 돈 잃은 사람에게는 보너스로 구슬을 내 주고, 담배도 한두 갑씩 건네는 서비스가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었다.

얼마 뒤 한 회장은 자형과의 약속을 지키고 본격적인 사업가로 출발했다. 32살에는 지하 1층에 지상 3층짜리 빌딩도 마련했다. 또 인근의 다른 점포도 인수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파친코’로 시작해 일본의 22번째 부호로 이름을 올린 한창우 마루한 회장. 77살의 한 회장은“남들보다 2배 열심히 살면 돈은 저절로 들어온다”며“아직 나는 한창 일할 나이”라고 했다.

그는 28살에 결혼했다. 9살 연하인 그의 부인은 일본인이다. 제과점에서 친구들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한 회장은 “다소곳한 모습이 영락 없는 한국 사람 같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처가의 반대가 심했다. 힘들게 결혼식은 올렸지만, 한회장의 가족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한회장 가족들 역시 일본인과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한 회장은 슬하에 5남2녀를 뒀지만, 장남 한철 씨는 16살 때 미국 연수 도중에 요세미티공원에서 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부사장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 한유 씨를 비롯해 아들 넷은 모두 마루한에서 일하고 있다.

38살이 되던 해 한창우 회장은 볼링장 경영에 뛰어들었다.

“사실 옛날 파친코는 좁고 음침한 분위기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해주지 않는 업종이었어요. 뭐 은행에서 돈도 안 빌려줬으니까요. 재일동포들이 많이 했던 이유가 취직은 안되고 돈을 벌 방법이 없으니 파친코에 뛰어든 거죠. 그 때 저는 사업 기반은 다졌으니, 인정을 받는 사업이 하고 싶었어요.”

# 볼링장 사업 뛰어들었다 빚더미에 

한 회장은 시즈오카(靜岡)에 120레인을 갖춘 볼링장을 비롯해 전국에 6개의 볼링장을 열었다. 당시 27억엔을 투자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오일쇼크의 영향과 볼링장 과잉 공급의 여파로 42살에 60억엔의 빚더미에 앉게 되고 말았다.

"정말 자살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린 아이들, 나만 믿는 집사람, 또 한국 청년 '한창우'를 믿고 보증을 서준 30여명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나 죽는 건 괜찮지만, 저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때 은행 간부가 한 회장을 불렀다. "내가 도와줄 테니 파친코를 하나 인수해 보라"는 것이었다. 볼링장 처분해봐야 10분의 1도 못 건지는 상황이었던 까닭에 오히려 한 회장의 제기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파친코 회사는 대출이 안 되는 상황이어서 다른 회사를 하나 만들어 돈을 빌렸다. 볼링장 부지로 물색해 놓았던 지역에 파친코를 만들었다. 교외로 차를 몰고 가서 즐기는 대형 파친코의 개념을 일본에 처음 선보인 것이 그 때였다.

"42살에 진 빛 60억엔을 52살에 다 갚았어요. 내가 살 길은 결국 파친코 밖에 없었어요. 물론 파친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싫었죠. 그래서 결심했어요. '내 갈 길이 파친코라면, 파친코의 이미지를 바꾸자'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법에 어긋나는 행위는 일체 안 하는 거죠. 마루한이 큐슈(九州)나 오키나와에 안 들어가는 이유는 그 쪽에선 폭력단(야쿠자)이 파친코에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마루한은 점점 덩치를 키워나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004년 3월24일자 기사에서 "마루한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일본 경제 성장과 함께 급성장했다. 설립자인 한창우 회장은 숱한 역경을 딛고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마루한은 현재 모든 수입과 지출을 실시간 전산으로 처리해 세무당국에 제출한다. "모든 자료가 자동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탈세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한 회장의 설명이다. 한 회장은 "만약 내가 탈세나 불법을 저질렀다면 1999년에 일본이 훈삼등(勳三等) 서보장(瑞寶章)을 줬겠느냐"고 했다. 일본 정부에서 이 훈장을 받은 재일교포는 이희건 신한은행 창립자와 한 회장뿐이라고 한다.

한 회장은 연간 10억엔 정도를 재단 등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 프로축구 오이타와 도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스폰서도 맡고 있고, 자신이 나온 삼천포초등학교의 시설 개선을 위해 2억원을 내놓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10억원을 한국 정부에 기부했다. 3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은 한국 문화와 관련한 연구 결과를 한국학이 개설된 전세계 대학에 전달한다. 1993년 결성한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전세계 동포 경제인들의 협력 증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 회장이 이끄는 마루한이 성장하자 재일동포 사이에는 시기와 불만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본 전체 파친코의 60%를 재일동포들이 운영하는데, 마루한에 밀려 문을 닫는 업체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창우가 들어와서 우리를 죽인다고 하는데, 일본 전국에 파친코가 1만6000개가 넘어요. 우리 마루한은 220개입니다. 무슨 영향이 있다는 겁니까. 사업은 자유 경쟁이에요. 아무 노력도 안 하고 한 달에 25번 골프나 치고, 매일 가라오케 가면서…. 경영 노력을 전혀 안 하면서 불만만 터뜨리는 거죠. 그런 말 들으면 부애(화난 마음을 뜻하는 '부아'의 경상도 사투리)가 난단 말이야."

한 회장은 "다른 교포가 운영하는 파친코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있을 때 내가 125억엔을 보증서준 적도 있다"며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헐뜯는 것은 패잔병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 2001년 日국적으로… 한국 이름은 그대로 

지난 2001년 한 회장은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서 재일동포 사회에서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우리 해외동포가 700만 명쯤 됩니다. 대부분 자기들이 사는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재일동포는 안 그래요. 물론 싫어하는 것도 압니다. 일본이 한국에 야만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감정이 나쁘죠. 아직도 자식들에게 '내가 눈 감을 때까지 국적 바꾸면 안 된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자꾸 그렇게 비판만 하니깐, 동포들이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는 겁니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취득해도 성은 바꾸지 않습니다. 미국 사회에 한국 성을 가진 미국인이 많아지면 한국에 더 이로운 거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에 '한국 이름을 가진 일본 국민'이 많아져야 합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한국', '나를 길러준 일본' 양쪽에 다 보답하고 싶어요. 내가 한국만 바라보고 있으면 '아, 저 사람은 언제든지 일본을 배신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이다'라는 시선으로 보게 되겠지요."

한 회장은 국적을 바꾸면서 '韓昌祐(한창우)'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한 회장이 한국 이름을 바꾸지 않고 국적신청을 했을 무렵 일본 아사히(朝日)신문(2001년 3월24일자)은 본명으로 일본 국적을 신청한 한회장의 이야기를 사회면에 톱기사로 실었다.

"민족은 100년, 200년, 30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국적은 그 나라에서 살 권리를 따는 겁니다. 내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때 고시엔(甲子園)야구대회(전국고교야구선수권)에 출전했을 때 주최측이 전광판에 '西原(니시하라)'라는 일본 성으로 쓰자고 했지요. 아들은 '유치원 때부터 나는 '韓(한)'씨였다'고 거절했어요."

물론 한 회장의 한국 이름 유지도 쉽지는 않았다. 법무성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냈더니 이번엔 외무성이 반대를 했다. 한 회장이 소송 불사 입장을 밝히자 1년 반 만에 받아들여졌다. 한 회장의 자녀들도 모두 한국 이름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한 회장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2배의 노력을 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지금 회장이지만 아직도 '전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토에 살고 있는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1시간 동안 산보를 하고 곧바로 회사에 출근해서 일본의 주요 일간지와 지방신문 등 7개의 신문을 다 읽는다고 했다. "신문을 봐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국 점포와 연결한 화상회의를 주재한다. 마루한은 교토 본사와 도쿄 본사로 나뉘어 있고, 실제 업무의 70%는 도쿄 본사에서 관장한다. 하지만 모든 결재는 한 회장을 거쳐야 한다.

# "실력, 신용, 교양 이 세가지면 어떤 차별도 극복" 

한 회장은 자신의 건강 비결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비서도 없이 혼자 다니는 그는 아직도 출장 떠날 때 "직접 양말과 빤쓰(팬티)까지 챙긴다"고 했다.

"예전엔 다소곳하고 말이 없던 집사람이 아, 이젠 나이를 먹으니깐 남성호르몬이 나와서인지 눈만 마주치면 뭐라고 혼을 내요. 그래서 그냥 내가 다 챙겨."

예전에 한일여자프로골프대항전을 후원하기도 했던 한 회장의 골프 실력에 대해 물어봤다.

"나요, 82타 쳐요. 그런데 그게 9홀까지 스코어 입니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한 회장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것 같아 별로 골프에 매력을 못 느낀다"고 했다.

한 회장은 "일본에서도 차별이 많았다"며 "하지만 결국 실력, 신용, 교양 이 세가지만 갖추면 어떤 차별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는 또 다시 '챌린지 정신'과 '헝그리 정신'을 강조했다.

최근 일본에서 자서전을 낸 77살 노인은 언제쯤 자신의 '은퇴'를 생각하고 있을 지 궁금했다.

"아, 난 전혀 쉬고 싶지 않아요. 일할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2010년까지 매출 5조엔을 만들려고 했는데, 2~3년 늦어지게 생겼어요. '세계 속의 마루한'을 만들기 위해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돈 넣고 하는 ‘구슬치기’… 日 점포만 16000여개 

파친코=현금이나 카드를 기계에 넣고 하는 ‘구슬치기’다. 핸들을 조작해 쇠구슬을 쏘고 구슬이 판에 박혀 있는 못 사이를 통과해 정해진 곳에 넣어야 한다. 당첨이 되면 정해진 구멍에 구슬이 들어갈 때마다 구슬이 쏟아져 나온다. 그 구슬은 인형이나 시계같은 물건으로 바꿔주는데, 파친코 매장 옆에는 작은 부스가 있어 대부분 이곳에서 경품을 현금으로 바꿔간다. 쇠구슬이 못 사이를 돌아 내려갈 때 나는 소리가 ‘파치’ 또는 ‘’파친’ 이라는 소리로 들리고, 그 후에는 구슬이 ‘코로코로’라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해서 ‘파친 코로코로’, ‘파친코로’ 등으로 불리다가 ‘파친코’로 굳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카지노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파친코가 성행하고 있으며 시장 규모가 30조엔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점포수가 16000여 개, 파친코 기계는 400만 대가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