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라는 얘기가 있다. 한때 못 나갔던 사람이 잘 나가게 된 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꼴불견에 가까운 상황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만일 개구리가 선진국 내지는 부자나라이고 올챙이가 개발도상국 내지는 저개발국이라고 한다면 장하준 교수가 지은 “나쁜 사마리아 인들”은 지금은 개구리가 된, 그러나 한때는 분명히 올챙이였던 선진국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로 가득한 책이다.

저자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개구리들이 올챙이 수탈을 위해 조작한 논리로 파악한다. 역사에 비유하면 일종의 정사(正史)인데 이것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더니 자신의 전략과 경험을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진실이 아닌 조작된 논리를 만들어낸 후 이를 현재의 올챙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구리들이 지금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거부하고 과거에 시행한 발전전략을 써야만 올챙이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장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다시 읽기’에서 저자는 토마스 프리드만의 유명한 저서에서 제시된 개념 즉 ‘황금구속복’으로 명명되는 국영기업 민영화, 물가안정, 작은 정부, 균형재정, 자유무역, 자본시장개방, 외환 자유화, 부정부패 제거, 연금 민영화 등의 목표가 선진국의 과거경험과는 다른 허구적 논리적인 체계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IMF 세계은행 WTO를 사악한 삼총사로 규정하고 이들이 이러한 신자유주의를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2장 ‘다니엘 디포의 이중생활’에서는 로빈슨 크루소를 저술한 다니엘 디포의 개인적 이력이 매우 복잡했었음을 상기시키며 디포가 저술한 ‘영국상업발전계획’을 인용하고 있다. 영국의 발전이 보호무역과 유치산업보호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도 영국이 강요하는 논리를 거부하고 해밀턴이 제시한 유치산업보호전략을 통해 성공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3장 ‘여섯 먹은 내 아들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에서는 여섯살 난 저자의 아들을 지금 직업전선에 내보내는 것과 교육을 더 시킨 후 사회에 진출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며 자국산업보호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다 . 그러면서 성공(선진국진입)을 했으니 자립(무역개방)을 하는 것이지, 자립을 했으므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4장 ‘핀란드 사람과 코끼리’에서는 과거 외국인투자를 억제한 핀란드가 노키아라는 기업을 키움으로써 성공한 예를 거론하며 외국인 투자에 대한 ‘현명한 규제’가 무조건적 개방보다 낫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5장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에서는 국영은 나쁘고 민영은 좋다는 식의 논리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며 ‘흑묘백묘론’를 인용해 국영이든 민영이든 성과가 좋으면 된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6장 ‘1997년에 만난 윈도 98’에서는 저작권 보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저작권 보호를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나 지금의 보호수준은 과도하므로 개도국들을 위해 보호수위를 낮추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7장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재정건전성 달성과 저인플레가 개발도상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목표인데도 IMF같은 국제기구들이 이를 강요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고, 8장 ‘자이레 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따르는데도 경제성과가 나쁜 나라에 대해서 민주주의와 부정부패를 거론한다며 부정부패와 민주주의가 경제발전과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9장 ‘게으른 일본인과 도둑질 잘하는 독일인’에서는 일본이나 독일이 한때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을 보면 국가의 문화와 경제발전에 대한 허상적 논리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 문화는 경제발전의 단계나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셜플랜부터 1970년대까지의 시대를 국가주의에 의해 통제된 세계화의 시대로, 1990년대 이후 시대를 신자유주의 이념에 의해 무분별한 세계화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통제된 세계화의 시대에 선한 사마리아인 같던 선진국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악한 사마리아인으로 돌변하여 세계 경제 내에 엄청난 불평등과 양극화가 초래되고 있음을 개탄하고 선진국들이 다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 ‘국가의 역할’ 등에서 주장한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제시되고 있고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어서 부드럽게 술술 읽힌다. 재미있는 비유나 사례가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올챙이들이 개구리가 되려면 보호무역을 채택하면서 자국기업을 상당 기간 키워야 하는데 작금의 상황을 보면 올챙이들이 이러한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 올챙이들은 영원히 개구리가 될 수 없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런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 당시 정말 선했는가. 아니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마리아인은 그냥 사마리아인으로서 철저하게 국익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지만 그 행태가 달라 보였던 것은 아닌가. 선했던 사마리아인이 왜 이리 갑자기 악해졌는가. 달리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제 생각은 우리 경제에도 미친다. 올챙이였던 우리나라가 이제 작은 개구리 정도가 됐다고 하면 다른 개구리들처럼 행동해야 하나. 아니면 올챙이 편을 들어야 하나. 최근 우리나라는 공산품 분야에서 개발도상국들의 시장개방과 자유무역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어느새 개구리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고양이, 쥐 생각한다”는 속담이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배려하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쓰는 말이다. 이 책은 고양이들이 쥐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과연 가능한 애기인가. 이 책의 분석의 한계인가 현실의 한계인가. 이 가을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보며 문득 우리 경제에 대해 한 번쯤 되돌아보고 고민해 볼 기회를 갖기 원한다면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을 메모하기 바란다. 여백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원제 ‘Bad Samarit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