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자금 특검법안은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 폭로한 비자금 의혹을 각 정당이 대선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도의 정치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특검이 쟁점화되고 법안이 발의·심의·처리되는 각 단계마다 각 정당의 이해관계와 대선전략이 얽히고 설켰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목적에 충실한 대선용 특검이 만들어진 것이다.

삼성 비자금 파문은 10월29일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그룹의 50억원 비자금 차명계좌 의혹을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이를 제일 먼저 대선 쟁점화한 것은 민주노동당이었다. 권영길 후보는 즉각 삼성에 대한 특검수사를 주장했다. 반(反)재벌 노선을 부각시킴으로써 진보 진영의 표를 결집, 지지율을 반등시키려는 의도가 컸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도 곧바로 ‘삼성 파문’에 올라탔다. 정 후보는 ‘반(反)부패 미래사회 연석회의’를 제안했고, 문 후보도 정·권 후보와 ‘반부패 3자회동’을 주장했다. 세 후보는 6일 회동을 갖고 삼성특검을 추진키로 전격 합의했다.

세 사람 모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출마 선언으로 지지율이 정체돼,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삼성특검을 통해 대선을 ‘부패 대 반(反)부패 구도’로 몰고 가면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를 동시에 부패후보로 공격해 범여권 지지율을 올릴 수 있다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이다.

신당과 민노당, 창조한국당은 1주일 만에 특검법안을 만들어, 14일 공동 발의했다. 신당은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를 겨냥, 2002년 대선자금을 수사대상에 넣었고, 민노당은 삼성의 불법상속 의혹 사건을 포함시켰다. 이는 김 변호사가 폭로한 50억원 비자금과 직접 관련은 없는 사안으로, 정치적 의도가 짙었다.

한나라당에는 비상이 걸렸다. 특검법에 반대하면 ‘삼성 비호당’으로 몰릴 것이고, 찬성하자니 대선자금이 걸리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한나라당이 꺼낸 카드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축하금’ 수사였다. 당선축하금을 넣으면 신당과 청와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란 계산이었다. 한나라당은 하루 만인 15일 독자 특검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대선에서 수세에 몰린 신당과 정 후보는 오히려 “한나라당이 특검을 막고 있다”고 공세를 펴면서, 당선축하금 수사를 수용했다. 이 기회에 노 대통령과 차별화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당초 특검법에 소극적이었던 한나라당도 20일을 전후로 “해도 불리할 게 없다”는 쪽으로 기류가 변했다. 여론의 비판을 피하고 이회창 후보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 수세 국면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각 당의 대선전략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삼성과 권력에 대한 모든 것’을 수사하는 포괄적 특검법안이 22일 국회 법사위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 등이 뒤늦게 “불법상속 전체를 수사하는 것은 위헌 논란이 있다”며 제동을 걸었지만, 대세를 되돌릴 순 없었다. 결국 수사범위와 수사팀 규모를 일부 축소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져 23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한 신당 의원은 “삼성 비자금 사건이 정치적 논의 과정에서 ‘대선 특검’이 돼 버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