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재산권에 대한 최초의 법적 소송, '라이몬디의 판화'
16세기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서양 미술사 최초의 표절사건이 발생했다.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i, 1480~1534)라는 판화가는 미술사 속에서 그다지 훌륭한 화가로 기억되지는 않으나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한 위작을 제작·판매해 더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는 1506년경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판화 총 80여 점 이상을 위작으로 만들어 판매했다. 뒤러의 목판화와 동판화는 모두 기술적이거나 예술적으로 완벽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라이몬디는 모두 36장으로 이루어진 뒤러의 목판화 '그리스도 수난전(受難傳)'을 동판으로 정확하게 모각하고 작가의 사인이라고 할 수 있는 고유 문양까지 똑같이 새겨 넣었다. 이 위작은 날게 돋친 듯 팔려나갔는데 뒤러가 이 사실을 알고 젊은 청년 라이몬디를 고소했다. 이른바 '표절'을 문제 삼은 첫 번째 사건이었다.
당시는 지적재산권과 같은 법률적 근거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가 고유의 문양만 뺀다면 별 문제가 없다'는 판결이 났다. 사실 당시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는 무명 화가들의 활동이 많았다. 그러나 라이몬디 사건 이후 변방 지역에서 온 시골화가들이 똑같이 모방을 하자 원작자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등 여기저기서 분쟁이 일어났다. 원작에 대한 독창성과 화가의 자존심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원작자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는 했지만, 라이몬디의 판화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유럽 전역에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라이몬디의 위작 판화는 기술적으로 훌륭했다. 그는 원작과 똑같이 만들어 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목판화와 동판화의 기법을 정교하게 연마했고, 특히 뒤러의 작품을 모방할 때는 입체적인 표현까지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뒤러의 고소사건 이후 베네치아에서는 활동하기가 불편했는지 라이몬디는 4년 뒤인 1510년, 로마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곳에서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및 그 제자들의 작품을 복제해 판매했다. 그는 소위 '복제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며 많은 돈을 벌었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라파엘로의 원작은 없고 복제품만 남은 '파리스의 심판'
라이몬디가 복제한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이다.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주제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 받지 못해 화가 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연회장에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라고 쓰여 있는 황금 사과를 남기고 떠난다. 그러자 올림포스 최고의 여신인 헤라, 전쟁과 지성(知性)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서로 이 사과를 갖겠다며 쟁탈전을 벌인다. 이에 신들의 제왕 제우스는 그 심판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에게 각각 선물을 제시하며 자신을 뽑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파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를 사과의 주인으로 선택한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아내로 맞게 해 준다. 하지만 헬레네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트로이를 공격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다.
라이몬디의 복제작 '파리스의 심판'은 작은 화면 속에 이 신화 이야기를 정교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 인간인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해 아양을 떨며 미모를 자랑하는 여신들이 보인다. 그 오른쪽에는 이 시끄러운 사건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한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거나 딴 짓을 하고 있는 바다의 신들이 있다. 이 작품은 원래 라파엘로가 그린 것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원작은 사라지고 라이몬디의 복제품만 남아 있다.
그로부터 35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 다른 화가의 손에 의해 '파리스의 심판'이 유명세를 타게 된다. '19세기 근대미술의 스캔들'로 회자되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가 '풀밭 위의 점심'이라는 작품에서 '파리스의 심판' 에 나온 인물(오른쪽에 있는 3명의 바다의 신)들의 포즈를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창작에 있어서 부분적인 모방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계속된다. 그래서 예술계에서 표절 시비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