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빈(58)씨는 보청기를 뺐다. 북 양쪽에 씌운 가죽면에 두 손바닥을 갖다 대고 오른손으로 가죽면을 두드렸다. 타닥타닥. 소리가 북을 타고 왼손을 지나 임씨의 가슴으로 올라온다. 그는 이 소리가 아닌 듯 고개를 저었다. 북가죽 가장자리에 끼운 갓줄을 오른손에 감아 쥔 뒤, 그는 북을 벽에 밀착시키고 왼손과 발바닥으로 밀어내며 갓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다시 타닥타닥.

그렇게 당기고 풀고 두드리길 수십 번, 임씨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뺐던 보청기는 다시 귀에 끼웠다. 이젠 손으로 만든 소리를 귀로 확인할 차례다. 북을 두들기는 임씨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리의 소년에서 북 공예가로

지난 8일 경기도 안양시 공방에서 만난 임씨는 충남 예산군 법원사에 보낼 법고(法鼓·절에서 불교 의식에 쓰이는 북)의 소리를 잡고 있었다. 8개월의 작업 끝에 완성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소리를 확인하는 것이라 했다. 법고를 새로 만들 때마다 삭발을 한다는 그는 이마를 간신히 덮는 짧은 머리에 낡은 군용바지 차림이었다.

임씨는 북메우기(가죽을 이용해 북을 만드는 기술) 악기장으로 1998년 10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됐다.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를 절면서도 한평생을 ‘북장이’로 살며 얻은 ‘명예’였다. 대신 그는 청력(聽力)을 잃었다. 40년간 북통을 두드리며 소리를 잡을 때마다 북 가까이 귀를 댄 까닭이었다.

1949년 충북 청주에서 소아마비로 태어난 임씨는 3남6녀 중 막내였다. 11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임씨는 홀로 서울에 올라왔다. 임씨를 맞이한 곳은 당시 판자촌이던 서부 이촌동. 그는 그곳에서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나 왼쪽 다리를 절던 임씨는 같이 다니던 형들에게 늘 매질과 놀림의 대상이었다. 참다 못한 그는 무작정 호남행 기차를 훔쳐 탔다. 전남 여수시에 도착, 한없이 걷다 굶주림에 지친 그를 거둔 이가 당시 북 공예의 대가였던 고 황용옥씨. 황씨는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해 주는 대신 북 공예를 배우길 요구했다. 어린 나이의 임씨는 먹고 재워준다는 말에 지체없이 황씨를 따라나섰다. 북장이 인생의 시작이었다.

12살 때 소의 배를 갈라 가죽을 구하고 북통을 짜기 시작한 그는 당시 시절을 ‘탱자나무 몽둥이의 찌릿함’으로 기억했다. “스승한테 맞았다 하면 그 자리에서 혹이 불거져. 혹독한 세월이었지.” 그 혹독함 속에서 보내길 12년, 그는 가죽 다루는 법과 가죽 부위를 구별해내는 안목, 소리를 조율하는 법 등을 익혔다.

황씨가 작고한 이후 그는 북 메우기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당시 전남 광주에서 북을 만들던 박일호씨에게선 가죽에 약품을 이용해 맑은 소리를 내는 비법을, 단청(丹靑)기법의 소유자 최성웅씨에게선 문양 넣는 법을 익혔다.

그렇게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거리의 소년은 북 공예가로 다시 태어났다. 동료들과 함께 청와대 춘추관북과 통일전망대 통일북, 88서울올림픽 기념북 등을 만들기도 했다.

◆ “소리는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것”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야. 몸으로도 듣지. 가죽을 두드리면 떨림이 심장까지 이어져. 보청기를 끼면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오히려 거추장스러워.”

청력을 잃은 지 올해로 20년째. 1987년 어느 날 아침, 임씨는 아내가 깨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길로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병원에선 “귀가 망가졌으니 손 쓸 도리가 없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임씨는 당시를 “아득한 시절”로 기억했다. “한 달 정도를 먹지도 씻지도 않고 살았어. 그러나 어쩌겠는가, 해온 게 이것뿐인데. 이런 생각으로 다시 북을 잡았지.”

그때부터 그는 법고를 만들 때마다 보청기를 뺐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의존하느니 손에 느껴지는 북의 떨림으로 소리를 잡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임씨는 “처음엔 귀가 안 들린다는 사실에 충격이 컸지만 귀로 듣는 것보다 온몸으로 듣는 게 음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지금은 오히려 축복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슴으로 소리를 듣는 임씨는 북을 새로 만들 때마다 길일(吉日)을 잡아 삭발을 한다. 평균 북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8개월, 그 기간 동안은 아내와 잠자리를 따로 할 뿐 아니라 술·담배도 피한다고 했다. “혹여 마음에 티끌 같은 먼지라도 끼면 안 되니까. 그러면 소리가 제대로 안 들려. 최대한 정결한 자세로 임해야 하지.”

◆“내 작품 전시할 박물관 갖고 싶어”

북의 생명은 소리다. 그리고 소리를 결정짓는 것은 가죽이다. 제일 좋은 것은 네댓 살짜리 황소 가죽. 가죽을 벗긴 뒤 동백기름을 먹이고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2개월 정도 반복한다. 단, 시기가 중요하다. 한여름은 피하고 선선한 바람이 오는 가을에 해야 한다.

북통에 쓰일 나무를 다듬는 과정은 더 힘겹다.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소나무를 최고로 치는데, 요즘은 국내에서 큰 소나무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캐나다 록키 산맥에 있는 소나무를 주로 수입해 쓴다. 수입한 소나무는 제재소에서 다듬은 뒤 석유통 같은 통에 넣어 떡 찌듯이 찐다. 그래야 나무 안에 박혀 있는 송진이 빠지면서 맑은 소리가 나기 때문. 찌는 과정을 세 번 되풀이한 뒤엔 건조가 남아있다. 건조는 자연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여름엔 비를 맞히고, 가을에 말리고, 겨울에 창고에 보관했다가 봄철에 다시 햇볕에 말린다. 그래야만 나무가 나중에도 모양이 변하질 않는다. 임씨는 “3년 정도 이렇게 건조해야 북이 깨끗하고 맑은 소리를 낸다”고 했다.

북 만들기의 지난한 과정 때문에 임씨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북을 만드는 장인은 이제 찾기 힘들다. 임씨는 “내가 10만원짜리 북을 만들면 중국 북은 2만원”이라며 “우리나라에 팔리는 악기의 99%가 중국산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임씨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내걸고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북을 만들고 싶은 미련. 그 미련으로 임씨는 한 평생을 버텼다.

임씨는 매달 80만원을 받는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받는 돈이다. 그러나 이 돈으론 8개월 걸려 만들곤 하는 대북의 재료 값도 되지 못한다. 임씨는 “주문이 들어올 때만 제작하는 장식용 북과 장고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임씨는 고개를 저었다. “돈 문제보단 명예가 중요해. 다만 욕심이 있다면 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박물관을 갖고 싶어. 사람이 죽어서 이름만 남기면 뭐 하는가? 작품을 넘겨서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가장 큰 욕심이지.”

그리고 그의 곁엔 7살 때부터 아버지의 ‘북장이 인생’을 지켜 본 아들 동국(25)씨가 있다. 동국씨는 아버지의 대를 잇겠다고 했다. “돈이야 어떻게든 벌 수 있잖아요. 북을 만들고 그 북을 쳐서 소리가 ‘꽝’ 퍼졌을 때 가슴이 웅클웅클한 느낌, 그걸 놓치기 싫어요.” 임씨가 힘들지 않은 또 다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