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 처녀들은 모두 정신대(종군위안부)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면서 절에서 환속(還俗)하는 비구니도 있었고, 어떤 스님은 '그렇게 끌려가느니 차라리 결혼해라'며 비구니 상좌를 결혼시키기도 했지요. 그래도 저는 그냥 남아서 계속 공부했어요."

국내 대표적 원로 비구니인 광우(光雨·83·사진) 스님이 자신의 출가와 수행, 포교 경험을 대담형식으로 풀어낸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조계종출판사)를 펴내고 17일 오후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광우 스님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따라붙어 '비구니계의 산 역사'로 불린다. 만 14세 때인 1939년 직지사로 출가한 스님은 최초의 비구니 강원 첫 졸업생이며 비구니로는 처음으로 4년제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졸업했다. 또 전국비구니회 설립을 주도해 초대와 2대 회장을 역임했고, 지난해에는 비구니로는 처음으로 다른 비구니 6명과 함께 조계종 비구니의 가장 높은 법계인 명사(明師) 반열에 올랐다.

하는 일마다 처음이 대부분이다 보니 곡절도 많았다. 스님은 동국대 재학시절에는 남장(男裝)을 하고 다녔다. "당시엔 비구니가 승복 입고 대학 다니기가 어색하던 시절이었어요. 결혼한 대처승도 많았고요. 그래서 군복 물들여 입고 머리는 상고머리로 깎고 4년 동안 남학생 행세하다가 졸업하던 날 다시 삭발하고 절로 돌아왔죠."

스님은 부친(혜봉 스님)과 모친(명성 스님)까지 모두 출가한 불교집안 출신이다. 그래서 출가 후 아버지는 '큰스님', 어머니는 '사숙(師叔)' 즉 '이모 스님'으로 불러야 했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때는 되게 공부를 못해서 상급학교 진학 원서도 못 받을 정도였는데 절에 왔더니 다른 행자가 하는 염불만 들어도 저절로 외지더라"며 "한번도 평범하게 사는 삶이 부럽지는 않았다"고 했다.

광우 스님은 1958년 서울 삼선동에 정각사를 세우고 어린이, 중고생, 대학생 법회와 일요법회 등 현대식 불교포교방식을 전파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또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미산 스님 등 승속(僧俗)을 떠나 우수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한 것도 불교계에서는 유명하다. 그러나 본인의 생활에는 지독한 구두쇠여서 지금도 정각사에는 수십 년 된 캐비닛, 의자 등 가재도구가 즐비하다.

이번 책 출간 후 제자들이 스승 몰래 시내 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려고 했다가 광우 스님에게 "마지막에 나를 더럽히려느냐"는 호통을 듣고 취소하는 일도 있었다. 지금도 국내외 어디이건 어떤 상황이건 새벽예불을 거르지 않는다는 광우 스님은 "저녁예불은 요새 더러 빠진다"고 부끄러워했다. 그의 제자인 정목 스님은 "광우 스님은 요즘도 제자들에게 '매일 세 번씩 머리를 만져보라'며 초발심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