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잔과 세련된 병은 술자리의 품격을 높인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아티카 지방에서 활동했던 도화가(陶畵家) 엑세키아스(Exekias)가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술잔을 만들었다. '킬릭스(kylix)'라고 불리는 술잔의 안쪽에 그는 포도넝쿨 뒤덮인 돛단배 위에 술잔 들고 앉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그려 넣었다. 돛단배 주변 바다에는 돌고래들이 헤엄친다.
해적에게 납치당한 디오니소스가 신통력을 부려 돛대에서 포도넝쿨이 솟아나게 하고 노를 뱀으로 변하게 하자 겁먹은 해적들이 모두 미쳐 바다로 뛰어들어 돌고래가 됐다는 그리스 신화의 모티프를 차용한 것이다. 항아리의 배경에 자연색만 남겨두고 인물과 세부를 검게 그리는 흑색상(黑色像) 기법의 대가였던 엑세키아스는 디오니소스와 배, 돛대, 돌고래를 모두 검게 표현했다. 이 작품은 잔에 술을 따를 때 완성된다. 신화에 따르면 주변 바다에 술이 범람해 배가 온통 술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주흥(酒興)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지지 않았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중앙박물관 소장품 '백자 끈 무늬 병(白磁鐵畵垂紐文甁)'은 온몸으로 "나 술병이오"라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잘록한 목 부분을 한 바퀴 감은 후 몸체를 따라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갈색 끈이 백자 표면에 철화 안료로 그려져 있다. 18세기 후반 국영 도자기 공장인 분원(分院)이 민영화되기 전까지는 도화서 화원만이 백자 표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백자 끈 무늬도 화원의 작품일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매화나 대나무 문양을 버리고 술병을 끈으로 묶어 허리춤에 차는 풍습에 착안, 병 자체에 끈을 그려 넣은 그의 재치가 돋보인다.
권주가(勸酒歌) 적힌 술병도 유행했지만 병에 담긴 술 내음에 마음이 동하면 언제라도 끈을 낚아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이 병의 무늬가 그 어떤 권주가보다도 술 맛을 돋운다. 우스개로 '넥타이병'이라고 불리는 병의 굽 안 바닥에 뜻을 알 수 없는 '니�히'라는 명문(銘文)이 한글로 적혀 있다. 보물 1060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