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국내에서 1200만 부 팔렸다. 7편 23권이니 권당 50만 부 넘게 나간 셈이다. 그 해리포터의 판매량을 능가한 책이 있다. 이문열의 삼국지도, 고(故) 박경리(朴景利)의 토지도 아닌 홍은영(洪恩英·44)의 '만화 그리스 로마신화'다.
이 만화는 공식적으로 1200만 부 팔렸다. '공식'이라는 말을 쓴 데는 연유가 있다. 작가는 출판사와 몇 년 전부터 인세(印稅) 소송을 벌였다. 소송 도중 출판사 장부(帳簿)가 발견됐는데 그 안에 1200만이라는 숫자가 기재된 것이다. 이 작품은 20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추정이다.
해리포터를 번역한 출판사는 돈방석에 앉았다. 책이 많이 팔린 데다 그 돈을 재투자한 곳에서 다시 대박이 났다. 그 출판사 사장은 마법(魔法)의 힘을 믿을 것이다. 만화가 홍은영도 돈방석에 앉아 신화(神話)를 꿈꾸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갖고 부산시 금정구 장전2동에 사는 작가를 찾았다.
금정산성 바로 밑 작가의 2층 양옥은 신화의 고향답지 않았다. 청소도 제대로 안 한 것 같았고 텅 빈 1층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벽과 천장은 짙은 밤색 일색이었고 계단은 삐걱거렸다. 잡초 무성한 정원에서 커다란 개 세 마리가 사납게 짖어대는 사이 고양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영화 '추격자'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작가는 "못 봤다"고 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집 분위기"라고 하자 키가 154㎝인 작가는 "뭐가 어때서예"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제야 방 3곳에서 여자 문하생(門下生) 10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첫 작품이 '은색의 대지'군요. 어떤 내용인가요.
" '모모'의 작가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가 원작인 책입니다. 현실 속에서는 너무도 나약한 소년이 위험에 처한 환상세계를 구하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는 내용이지요."
―1986년 작(作)이군요. 당시 22세면 데뷔가 빠른 축에 속하나요?
"그 작품은 남편이 글을 쓴 거지요. 그림만 제가 그렸습니다. 데뷔작이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멋모르고 내놓은 것이라고 봐야지요."
―그 후에도 '눈물의 다이아몬드' 같은 작품을 출간했지요.
"먹고살기 위해 그린 것입니다. 제 만화세계가 구축되기 이전의 것들입니다."
―먹고살려면 어느 정도 벌어야 합니까.
"굶지 않고 문화생활 할 수 있는 정도면 되지요. 열심히 그리면 몇천 만원은 손에 쥘 수 있습니다."
―'은색의 대지'는 고료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권당 40만원 받았죠. 초일류 작가들이 권당 400만원 받던 시절입니다."
―본인의 만화세계가 구축되기 전이라면 누구를 모방했다는 뜻인가요.
"이현세씨나 박봉성씨, 허영만씨처럼 유명 만화가의 작품을 알게 모르게 따라 했다는 뜻이지요. 만화 그리스 로마신화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저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벽'을 넘어서기 위해 들인 시간이라고 봐야죠."
―고신대 기독교 교육학과 84학번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학기 만에 만화를 그리겠다며 학교를 중퇴했지요.
"어릴 적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부모님들은 자식이 만화가 된다면 펄쩍 뛰잖아요. 제 꿈도 살리고 부모님의 소망도 들어줄 요량으로 부산대 미대에 지원했는데 낙방했습니다. 고신대는 그래서 갔지요."
―부모가 완고한 편이었습니까.
"아버지는 최고의 기술자였어요. 한진중공업에서 수여하는 기장(技匠)까지 지냈습니다만 조용한 성격이지요. 매 한번 때리지 않았어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펄펄 뛰었지요."
―다른 가족들은 평범한 직업을 가졌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동생이 팬터마임 하는 연극배우(홍혜영)이고 남동생은 가스펠 작곡(홍종명)을 합니다. 예술 기질 있는 집안인 셈입니다."
―고신대를 그만둔 뒤 곧바로 만화를 그렸나요.
"김혜린씨 문하생으로 입문했어요. 김혜린씨는 저보다 몇 살 위지만 신일숙, 김진씨와 함께 3대 순정만화가로 꼽히는 분이지요."
―문하생 생활이 도움이 됐습니까.
"배경만 그리다 나왔지요."
―남편(趙英基·48)도 만화가였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은 어렸을 적부터 동양화를 그리다가 만화로 전향했지요. 한창 작품을 만들어야 할 때 오른손 신경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남편과 언제 만났습니까.
"1986년 교회 수련회 때 알게 됐습니다."
홍은영의 남편 조영기는 키가 181㎝에 90㎏이 넘는 거구다. 그런 그에게 수련회에 나타난 가냘픈 대학 중퇴생이 "만화가가 꿈"이라고 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홍은영에게 만화를 그려보라고 했다. 수련회가 돌연 만화 테스트의 장(場)이 된 것이다. '뭘 그릴까예'라는 말에 그는 사슴을 그려보라고 했다.
"선(線)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이 여자는 선천적으로 만화 유전자를 타고났다. 체계적으로 훈련받으면 거물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즉석에서 홍은영을 만화가로 키워보자고 마음먹었지요." 만화계의 선배였던 조영기의 말이다. 그 뒤 그는 홍은영을 하드트레이닝 시키다 1년 뒤인 87년 아예 결혼해버렸다.
말 많은 남편과 말 없는 아내를 보며 기자는 "혹시 만화를 핑계로 강제 결혼한 것 아니냐"고 묻자 부부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홍은영의 나이는 결혼하기에는 이른 23세에 불과했다. 잠시 후 부부는 동시에 "서로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했다.
만화가가 받는 트레이닝은 인체를 역(逆)으로 해부하는 것이다. 맨 먼저 인체의 뼈를 모두 그린다. 뼈가 완성되면 그 위에 근육을 입힌다. 근육이 완성되면 그 위에 살을 그린다. 살이 완성되면 그 위에 옷을 그린다. 이런 수련을 반복하지 않으면 등장인물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진다.
―만화 그리스 로마신화가 언제 처음 나왔지요?
"2000년 11월에 첫 권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구상한 작품입니까.
"기획만 3년 정도 소요됐습니다."
―기획은 뭘 기획하는 건가요.
"글과 그림, 스토리 전개 방향을 정하는 거지요. 그림체도 어떻게 해야 독자들에게 더 어필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뜻이 안 맞을 때도 있잖아요.
"저희는 잘 안 싸우지만 한번 붙으면 살벌하게 싸웁니다. 특히 작품을 놓고 언쟁이 붙으면요."
―왜 그리스 로마신화를 생각했습니까.
"당시가 세기말(世紀末)이었잖아요. 세기말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지요. 대중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신화를 들고 나온 건데 결과적으로 적중한 셈이지요."
―그 책이 대박을 터뜨렸다는 걸 언제 알았나요.
"3, 4권이 나왔을 때부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음 책이 언제 나오느냐는 문의가 잇따랐다고 합니다."
―왜 대박이 터졌다고 생각하나요.
"그리스 로마신화에는 많은 신(神)들이 등장합니다. 100명이 넘지요. 책으로 읽다 보면 자꾸 앞에 나온 신들을 잊게 돼지요. 만화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쉽게 신들의 에피소드를 이해할 수 있고 기억하기도 쉽지요. 과거 문학전집에 그리스 로마신화는 항상 1, 2권이었어요. 그렇지만 책장에 꽂혀있기 일쑤였지요. 반드시 읽어야 하지만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준 게 독자들을 끌어들인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신 100명의 캐릭터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외국에 있는 조각이나 도판(圖版)을 일일이 입수해 분석한 뒤 현재의 느낌을 살렸습니다. 예를 들면 신상(神像)들은 하나같이 콧대가 안 들어가있지요. 그런 모습은 인간에게는 없는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콧대를 전부 넣어서 그렸습니다."
―말이 쉬워도 그 많은 신을 일일이 달리 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예를 들면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이기 때문에 바다의 이미지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착안한 게 머리 모양을 포말(泡沫)처럼 만드는 거지요. 제우스는 우주의 신, 하늘의 신이기 때문에 고전적 이미지를 살리고 지하세계의 신인 하데스는 음침하게 그리는 식입니다.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한 명 한 명 모두 그 신 나름의 본성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최고 미남(美男)인 아폴론의 경우 국내나 외국의 미남 배우 이미지가 약간이라도 들어가 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신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신이 있나요.
"한 명 한 명 다 애착이 가지요. 달리 누구라고 집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아! 이 부분은 참 재미있다'라고 생각들 때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헤라클레스가 나오는 부분이 재미있지요."
―제일 쉽게 만들었거나 제일 어렵게 만든 신의 캐릭터가 기억나나요.
"쉽게 만든 캐릭터도 없고 그렇다고 머리카락 쥐어 뜯으며 만든 캐릭터도 없습니다."
―원래 그리스 로마신화가 음란(淫亂)한 내용이 많지 않습니까. 만화에는 그런 부분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건전하게 윤색(潤色)을 해야지요. 아폴론만 해도 바람둥이지만 만화에서는 건전한 애인(愛人)처럼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외설적인 그리스 로마신화가 왜 지금 같은 내용이 됐다고 봅니까.
"그리스 로마신화의 틀을 현재처럼 만든 사람이 토마스 불핀치입니다. 불핀치는 엄격한 청교도였지요. 종교의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동화나 신화에는 이런 일들이 빈번하지요.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백설공주만 해도 백설공주의 남편이 되는 왕자의 직업은 원작에서 시체수집가였습니다. 아주 엽기적인 내용이었죠."
홍은영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2단계로 작업이 진행된다. 홍은영이 그린 원화(原畵)를 컴퓨터로 스캔하면 그 위에 문하생들이 색을 입히는 것이다. 홍은영은 과거 얼굴과 옷처럼 주요 부위에만 색을 입혔던 다른 작가들과 달리 전면컬러를 사용한 최초의 만화가다.
이 작업을 홍은영과 문하생 10명은 종일 한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작업하다 밤 되면 자는 게 일과다. 그러다 보니 그는 세상사에 무심하다. 결혼을 언제 했는지, 영국에서 공부하는 두 딸이 어디에서 학교를 다니는지, 어느 만화가 몇 년도에 발간됐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자가 물으면 보다 못한 문하생들이 대신 답을 해줬다.
마지막 휴가, 마지막 외출이 언제였는지 그는 몰랐다. 그 건조한 생활이 홍은영은 재미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집에서 일 안 하고 밥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만화 안 그리는) 남편과 개, 고양이밖에 없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슬이 퍼레진 홍은영을 보며 문하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였다면 홍은영은 20권짜리 그리스 로마신화를 끝낸 뒤 중국 신화, 수메르 신화에 도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 3대 신화를 모두 만화화하겠다는 그의 꿈은 출판사와의 인세소송이 시작되면서 중단됐다. 소송은 최근 그의 승소(勝訴)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많았다.
―무엇을 잃었습니까.
"제가 죽었다는 헛소문도 여러 번 났지만 그런 건 견딜 수 있어요. 지금까지 낸 그리스 로마신화의 개정판을 다시 그리고 있는 게 사실은 힘들지요. 토마스 불핀치의 책에서 벗어나 원전(原典)에 충실한 내용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한번 그렸던 작품을 다시 하는 게 지루하지는 않습니까.
"완전히 다른 작품이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완전히 다르다니요?
"그림도 이야기도 다릅니다. 전에는 출판사에서 준 대본으로 그렸는데 지금은 대본도 저희가 만들지요. (그러면서 홍은영은 마므레 출판사에서 발간한 새 그리스 로마신화를 보여줬다. 새 책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과거와 모습이 달랐고 테크닉이 훨씬 복잡해 보였다. 출판사 이름인 마므레는 '약속의 땅'이란 히브리어라고 한다.)
―요즘 참고하는 원전이라는 게 어떤 책들을 말하나요.
"아폴로도르스나 헤시도우스의 책들이 있습니다."
―심한 병도 앓았다고 들었습니다.
"베체트병이라고 조금만 무리하면 특정 부위의 피부가 파이다 열이 나면서 부어오르는 병이지요. 완치가 힘들어 음식에 주의하고 하루에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운동은 특별한 게 아니고 1시간 정도 스트레칭하는 겁니다. 올케가 간호사여서 병을 빨리 발견한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렇게 건강이 안 좋으면 작품 하나를 끝낸 뒤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텐데.
"기절하다시피 자리에 눕게 되죠. 저뿐 아니라 문하생들도요."
―3대 신화를 완성한 후에는 어떤 분야에 도전하고 싶은가요.
"성경(聖經)을 그냥 책으로 읽으려면 무척 어렵잖아요. 만화로 그리면 알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외국의 신화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왜 단군신화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그릴 생각은 안 하나요.
"신화라고 하지만 사실은 모든 신화가 역사의 축적이지요. 저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요. 그렇지만 건국신화는 사정이 다릅니다. 역사의 축적이라기보다는 허구(虛構)가 많이 가미됐다고 할까요."
―원래 그렸던 그리스 로마신화가 중국어로 번역돼 판매되다 중단됐다던데 사실인가요.
"중국작가출판사라는 곳에서 출간됐지요. 2003년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신화를 번역한 이윤기씨와 함께 작가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만 인세 소송이 일어나면서 중단됐습니다."
―중국 진출이 중단된 게 억울하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8월쯤 영국에서 제 만화가 출판될 겁니다. 총 24권 분량이고 현재 에이전트를 통해 최종 교섭을 벌이고 있지요. 제목은 아마 '홍 작가의 그리스 로마신화(Hong's Greek and Roman Mythology)'가 될 것 같아요."
―특별히 영국 진출을 계획한 이유가 있나요.
"영국 시장에서 통하는 만화는 세계에서 통합니다. 영국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면 일본, 미국을 비롯해 세계 70개국에 진출할 계획이에요. 만화 외에도 애니메이션, 캐릭터 사업도 구상하고 있지요. 영국의 해리포터가 한국 시장을 장악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영국 시장을 누빌 차례지요."
홍은영은 소송이 벌어지기 전, 문제의 출판사와 권당 7%의 인세를 받기로 했다. 7%는 595원이니 2000만 권 팔렸다고 가정하면 120억원을 손에 쥐었어야 옳다. 그런데 이 만화가 부부는 수중에도, 은행 통장에도 돈이 별로 없다고 했다.
부부가 기자에게 '집 좀 손보고 살아라'는 핀잔을 받게 된 것은 어려운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들은 연고를 가리지 않았고 주변 고아원 몇 곳에도 기부를 계속했다. "당신들 도움으로 성공한 사람이 돈을 갚은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런 사람 없었어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만화 그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 것을 보면 재테크는 엉망인 모양입니다.
"먹고살면 되지요. 번 돈을 다 어떻게 씁니까, 남도 도와야지요."
―나이 들 때 대비해 저축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희 부부는 그림 그리는 게 노후 대비지요."
―독자들이 그리스 로마신화를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그리스나 로마에는 가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한번 다녀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선일보에서 한번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