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세, 5t 화물트럭 운전 8년, 서울시내 마을버스 운전 2년, 20년 무사고' '47세, 1t 포터 5년, 2.5t 화물트럭·마을버스 각 1년, 15년 무사고'….
30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시내버스업체인 한남여객운수 사무실. 운영관리부 이홍로(57) 차장이 캐비닛에서 두툼한 버스기사 지원자 이력서 뭉치를 꺼내놓았다. 이력서의 인물들은 저마다 '화려한' 운전 경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차장은 "시내버스 준(準)공영제를 실시한 이후 나가려는 사람은 없고 들어오려는 사람은 줄을 서 있다"며 "받아놓은 이력서는 수백장이지만 정년이 차서 나갈 때 외에는 빈자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내버스 205대에 버스기사 430여명을 거느린 한남운수는 지난 3월, 2년여 만에 처음 기사 2명을 새로 뽑았다고 했다. 정년으로 퇴직한 두 명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버스기사 고용은 안정, 급여도 상승
주요 지방자치단체들이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실시하면서 버스기사들의 처우가 크게 개선돼 시내버스 기사 지원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과거에는 버스기사들의 잦은 이직(離職)과 구인난으로 '버스기사 급구, 초보자·무경력자도 환영'과 같은 문구를 뒷유리창에 붙이고 다니는 시내버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지만 최근 이런 광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취업 희망자들은 오히려 "버스기사로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워졌다"고 하소연한다.
현재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실시하는 지방자치단체는 서울을 비롯해 부산·대구·대전·광주·마산 등 6개 도시. 이들 도시에서는 시내버스 운송 원가를 계산해 수익금이 모자라면 시 예산으로 손실분을 보전해주고 있다.
버스 회사들이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면서 적자노선에 대한 일방적인 감차(減車)나 노선 단축, 노선 폐지 등이 없어졌다. 이로 인해 시내버스 기사들의 고용 안정성이 크게 호전됐고, 급여도 대폭 인상됐다.
서울시 버스운송사업조합에 따르면, 서울 시내버스 기사들의 경우 준공영제가 실시된 2004년 하반기에는 임금이 한꺼번에 평균 16% 정도 상승했다. 현재 4년6개월을 근속한 서울 시내버스 기사의 경우, 수당과 상여금을 포함해 세전(稅前) 평균 월 302만원의 급여를 받는다. 준공영제에서 제외돼 있는 마을버스 기사의 평균 월급이 150여만원인 것에 비하면 두 배에 달하는 액수다. 게다가 시내버스 기사는 만 59세까지 정년이 보장되고, 자녀 학자금 지원 등의 혜택도 있다.
이 때문에 각 버스 회사마다 입사 지원자들의 이력서가 수백장씩 쌓여 있다. 서울 성북구에서 마을버스를 모는 한성기(40)씨는 "몇 개 시내버스 회사에 이력서를 내 놓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일자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도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부산 삼신교통에는 운전기사 취업 대기자가 50여명에 달한다. 마산의 시민버스㈜ 인사담당 오두환씨는 "지난 8월 정년퇴직으로 발생한 결원 1명을 보충하려고 모집공고를 내자마자 12명이 바로 달려왔다"며 "모두 화물차나 버스 운전 경력이 십수년 이상인 베테랑 기사들이었다"고 말했다.
준공영제가 실시되는 6개 도시 버스운송사업조합에 따르면 6개 도시의 시내버스 기사는 모두 3만여명이다. 하지만 화물차 등에서 전직(轉職)하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3~4배에 달하는 버스 기사 취업 대기자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유가도 버스기사 인기에 한몫
고유가와 경기침체도 시내버스 기사로 지원자들이 몰려들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익이 급감한 화물차나 덤프트럭, 레미콘 기사 등 1종 대형면허를 가진 운전자들이 시내버스 기사로 전직하려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5t 화물트럭으로 전남 여수와 서울을 오가며 화물을 운반하는 화물차 운전기사 이모(48)씨는 "2000년 화물 경기가 좋을 때 시내버스에서 화물차로 일을 바꿨다"면서 "요즘 다시 시내버스로 옮기려 하지만 자리가 나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버스 준공영제로 시민의 세금이 버스 업체와 기사들에게 투입되는 것에 비해 서비스 개선은 충분치 않다는 지적도 많다. 서울시의 경우 매년 평균 1600억원 가량의 버스업체 적자를 예산으로 보전해주고 있다.
한국교통시민협회 김기홍 대표는 "준공영제 실시 이후 시내버스 친절도에서 일부 개선은 있었지만 차선 변경 위반이나 과속 등 시민의 안전과 직결된 서비스는 거의 향상되지 않았다"며 "세금 지원의 결과가 특정 업체나 직군(職群)만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