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배진성

“자네 잘 있게.”

지난 10월 초 마산삼성병원 상가(喪家)에서 화제가 됐던 말이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부친 김홍조(金洪祚) 옹이 별세한 것은 9월 30일. 향년 97세. 한국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대통령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누렸으면서도 대통령 아들에게 부담되는 일을 일절 하지 않았던 김홍조 옹.

김홍조 옹은 8월 이후 노환에 폐렴이 겹치면서 기력이 쇠약해져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왔다. 그러던 9월 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부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마산으로 내려갔다. 9월 23일 오전 11시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손명순 여사는 병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81세의 아들이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부친이 남긴 말 “자네 잘 있게”

“아버지 어떠세요?”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아버지는 아들과 며느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아들은 계속 아버지를 불렀지만 묵묵부답. 아들은 아버지의 눈동자가 느릿느릿 매우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아들 내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 시작한 지 30분쯤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가 힘겹게 입을 뗐다.
"자네 잘 있게."

아들은 아버지가 곧 숨을 거두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침상 머리맡의 심장박동기의 그래프를 확인했다. 심장박동기 그래프는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아들은 의료진으로부터 “오래 사시기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을 듣고는 서울로 올라갔다. 일주일 뒤인 9월 30일 오전 1시47분 김홍조 옹이 영면했다. 서울 상도동 자택에 있던 아들은 아버지를 임종(臨終)하지 못했다.

2개월 이상 병상에 있던 김옹이 유일하게 한 말은 “자네 잘 있게”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영삼아 잘 있어라”라고 하지 않았다. 아낌없이 모든 걸 주고 가면서도 아들에게 끝까지 예의를 지키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자네 잘 있게’라는 짧은 문장에 농축되어 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가는 사람이 산 사람과 나누는 이승의 마지막 커뮤니케이션.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하는 경험 중에서 회광반조보다 감격적인 순간도 드물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의 입장에선 고인이 눈을 감기 직전 남긴 말이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위로와 힘이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절명한다.

‘의학적으론 사망’ 불구 의식 안 놓아

회광반조는 원래 일몰(日沒) 직전 일시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추어 하늘이 잠시 동안 밝아지는 자연현상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재는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이 잠시 동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센터는 주로 말기 암 환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돌보는 병동이다. 말기 암환자들은 다른 환자들과 달리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숨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호스피스병동의 한 관계자는 “의학적으로는 이미 돌아가셨어야 하는데 못 돌아가시고 있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면서 “이런 분들은 멀리 떨어져 있던 자식이 찾아오면 순간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 자식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얼마 뒤에 운명하는 경우를 본다”고 말한다.

혼수상태에 있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기 때문에 보호자들은 환자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마음을 놓는 경우도 있다. 한나라당 최구식(崔球植) 의원(진주 갑)이 이런 경험을 했다.

최 의원은 2004년 12월 22일 어머니(장석순)를 여의었다. 최 의원의 어머니는 작고하기 5년 전부터 치매와 신부전증으로 병원생활을 했다. 최 의원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12월 16일 허겁지겁 진주의 한 종합병원으로 내려갔다. 최 의원은 “어머니는 막내 아들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사실도 아시는 것 같지 않았다”면서 “한번도 안다는 표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너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최 의원은 병실을 지키며 틈 나는 대로 어머니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머이, 너무 억울해 하지 마이소. 어머이 배로 낳은 아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진주 어르신들 사랑 받고 있습니다.”

5년 만에 입 밖에 낸 한마디

메아리 없는 외침. 그렇게 여러 날이 흘렀다. 12월 22일 아침. 최 의원은 늘 하던 대로 어머니의 귀에 입을 대고 불렀다. "어머이!"

순간 어머니는 '와'하고 대답했다. '와'('왜'의 경상도 사투리)는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 모양으로는 틀림없는 '와'였다. 5년 만에 보인 첫 반응. 최 의원의 누이와 외숙모가 이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최 의원은 기쁜 나머지 어머니에게 "어머이"를 반복했다. 더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최 의원은 뛸듯이 기뻤다.
기분이 좋아진 최 의원은 처음으로 지구당사무실에 들렀다. 오후 3시쯤 최 의원은 큰누이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전화였다. 최 의원은 "아침에 그렇게 좋았는데,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냐"고 대답하고는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최 의원은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뺨에 얼굴을 부볐다. 어머니는 그렇게 운명했다.
'와'는 어머니가 막내아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최 의원은 어머니의 회광반조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어머니가 어떻게 그렇게 맑은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또 표시를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내가 찾은 답은 돌아가시기 전에 '구식아, 내 다 안다' 하는 것을 알려주시려 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너무 슬퍼할 것을 염려하여, 내 다 알고 가니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고 슬퍼하지도 말라는 메시지를 남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남은 생명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그 힘으로 그 말을 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미움도 恨도 다 놓고 떠난다" 
한(恨)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원인 제공자가 용서를 빌어오면 회광반조를 보이기도 한다. 2003년 12월 작고한 허주 김윤환(金潤煥) 전 신한국당 대표가 그런 경우였다. 2000년 총선에서 공천 탈락한 허주(虛舟)는 오랫동안 이회창(李會昌)씨에 대한 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었다. 허주는 "이회창씨가 내게 직접 용서를 빈다면 받아주겠지만 그가 그럴 사람인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다 암이 발병해 미국으로 건너가 투병생활을 해왔다.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자 허주는 병원 치료를 포기하고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머물고 있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운 채 진통제를 맞으며 지내던 그는 지인들이 찾아와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2003년 10월 28일 이회창씨가 병상의 허주를 찾았다. 허주는 생각지도 못한 이회창씨의 병문안을 받고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돌아와 힘들게 말했다.
"미국에 있다더니 언제 왔어요?"

이게 허주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허주는 그해 12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승에서의 원한(怨恨)이 풀리는 순간 회광반조가 일어난 것이다.

모현호스피스센터의 병실에서 수녀가 암환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호르몬 일시 방출로 일어난 현상"

의사들과 호스피스의 말을 종합하면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단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있는 감각은 청각이다. 죽음의 계곡을 오락가락하는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도 주변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는 얘기다. 다른 감각 기관이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반응하지 못할 뿐.

경험 많은 의사들은 대부분 회광반조 현상을 목격했다. 그러나 회광반조 현상이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되지는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과 박용천 교수는 회광반조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임종 단계에서는 극한 상황에 대처하는 호르몬이 일시적으로 한꺼번에 방출된다. 그럴 때 정신이 반짝하고 컨디션이 좋아진다. 임종 직전인 사람이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 경우 심리적으로 회광반조에 영향을 준다.”

자식을 보고 싶다는 초자연적 의지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방송작가 노순씨는 1993년 봄 어머니를 여의면서 회광반조를 경험했다. 노순씨는 2남2녀의 셋째. 딸로는 큰딸이었다. 그 시대의 모든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럴수록 큰딸은 어머니에 대해 반항하곤 했다. “넌 여자니까…”라고 할 때마다 큰딸은 그와는 반대로 나갔다.

자식을 위해 흘린 마지막 눈물

노씨가 미국 연수를 간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살 때였다. 막내 시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 노씨는 오랫동안 해소기침과 기관지 합병증으로 고생하던 어머니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노씨는 늘 반복되어온 일이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행 비행기가 하루 연발(延發)되어 예정일보다 하루 뒤에 한국에 도착했다. 오후 2시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노씨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노씨의 설명이다.

"병원에 도착하자 오빠들은 엄마가 아까 2시경에 심장박동이 멈췄다고 말했습니다. 의사들이 손을 떼고 나간 상태에서 '순이 오는 거 보고 가시라'고 심폐소생술을 했다고 했습니다. 오전에 이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던 터라 바이탈사인이 제로가 된 상태에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빠들이 '조금 있으면 순이가 오니까 보고 가시라'고 말하면서 깨워놓았다고 하더군요. 제가 병원에 도착한 것은 3시 반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병실로 들어서니 엄마는 침대에 눕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헉헉 숨을 쉬면서 힘들게 앉아계셨습니다. 오빠들은 엄마가 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침대로 가 '엄마, 나 왔어'라고 말하자 엄마는 저를 보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저는 엄마가 돌아가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말씀은 못하셨지만 저를 보고 우셨기 때문에 엄마의 상태가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20~30분 거리에 있는 친정집에 아이 우윳병을 소독하기 위해 갔습니다."

노씨는 친정아버지와 잠시 인사를 나누고 아이 우윳병을 삶기 시작했다. 이때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노씨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알아보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오빠들이 말하기를 원래는 제가 오기로 한 날인 그 전날에 고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행기가 하루 미뤄져 제가 늦게 온다고 하니까 그나마 그때까지 버티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딸, 그것도 엄마를 미워했던 딸, 엄마와 살가운 이야기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딸을 기다리기 위해 힘겨운 사투를 벌이시고, 숨이 넘어간 상태에서도 딸내미 얼굴을 보고 가시려고 다시 발걸음을 돌리셨던 엄마였습니다."


노씨 어머니의 경우처럼 회광반조 현상은 대부분 짧게 나타난다. 드물게는 정신이 돌아와 한나절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의사들조차도 환자가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외과 고성호 교수는 2000년 회광반조 현상이 여러 시간 지속되는 것을 경험했다.


"환자분은 뇌경색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던 노인이었습니다. 혼수상태가 2주 이상 지속되었죠. 그래서 의료진도 보호자도 (회생 기대를)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심폐소생술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후부터 의식이 좋아졌습니다. 주변에 대한 반응을 전혀 못하던 환자분이 보호자들이 묻는 말에 간단한 답변을 하는 상태가 되었지요. 보호자들도 말할 수 없이 기뻐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 반응이 괜찮았어요. 그래서 의사들도 환자분이 좋아지는 것으로 판단했지요. 그런 상태에서 하룻밤을 지내나 싶었는데 갑자기 새벽에 운명하셨어요."


이 세상 모든 노인들의 소망은 한 가지. 아프지 않고 잠자면서 편안히 저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것.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하루도 아프지 않고 작별하는 것(9988004)이다. 2006년 1월 별세한 민관식(閔寬植) 전 대한체육회장이 바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9988004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유가족의 입장은 다르다. 떠나는 이와 말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어한다. 이게 어렵다면 단 한번 눈빛이라도 마주치고 싶어한다. 아무런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떠나면 두고두고 미련이 남는다는 얘기다. 어차피 한번 왔다 가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세상. 가는 이가 남는 이와 마지막 커뮤니케이션을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 인터뷰 | 모현 호스피스의료센터 정극규 진료원장

“죽음은 삶의 완성… 준비된 죽음이 행복한 죽음”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모현호스피스의료센터는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에 있다. 정극규 진료원장은 외과의사로 수년간 캐나다와 미국에서 호스피스완화의학을 공부했다. 지난 10월 17일 오후 의료센터에서 정 원장을 만났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을 텐데. “죽음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일련의 과정이다. 그 과정을 편하게 하느냐, 그 과정을 어떻게 계획하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이 자기 죽음에 관여하는 운동, 즉 자기 죽음을 관리하고 계획하는 게 필요하다.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된다. 죽음을 용인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예컨대 ‘살 날이 얼마 남았다’는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홈페이지에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인간은 육체만으로 형성된 유기체가 아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자서전을 쓴다든지 성경을 완독한다든지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진하다 보면 성취감을 느낀다.”

숙면 중 영면한다든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 “캐나다에서 공부를 할 때 골프를 치다 죽은 사람을 세 명 봤다. 가는 사람은 좋을지 몰라도 여기에는 ‘준비’가 빠져 있다. 준비된 죽음이 행복한 죽음이다. 소크라테스도 죽을 때 닭 한 마리 빌린 것까지 갚으라고 말했다. ‘준비’ 없이 가게 되면 사망 이후 가족끼리 다투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재산 문제 등을 비롯해 숨겨놓은 것을 꺼내 정리하고 가야 한다.”

한국인은 죽음을 얼마나 준비하고 있다고 보나. “준비에 대한 교육이 전혀 안 되어 있다. 웰빙(well-being)은 활발하지만 웰다잉(well-dying)은 관심이 없다. 사생관(死生觀)의 교육을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한다. 특히 죽음관이 중요하다.”

가장 힘들게 이승과 작별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인가. “집착과 물욕과 관계를 끊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좋은 세상을 두고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느냐’고 말하며 괴로워한다.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 친구한테 빌려준 1억원을 돌려받아 현금으로 바꿔 그걸 쌓아놓고 가족들과 기념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 무척 씁쓸했다.”

임종 직전의 회광반조는 어떤 경우 나타난다고 보나. “나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네 가지를 얘기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랑을 얼마나 베풀었는지, 얼마나 감사를 했고 용서를 했는지, 작별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말한다. 네 가지 문제에 대해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환자는 주변에 반응하지 않다가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가족의 손을 잡아주거나 짤막한 대답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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