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금 내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죠?"
"… 없습니다.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전단지를 그렇게 마구 나눠주면 사람들이 길거리에 다 버리고, 결국 국가 비용으로 치우게 되지 않습니까."
"…."
27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서관 501호 즉결심판 법정. 판사의 질책에 주부 최모(51)씨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3일 전 대치동에서 음식점 홍보 전단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적발된 최씨는 벌금 3만원을 선고받았다. 벌금으로서는 적은 액수가 선고됐지만 최씨로서는 하루 벌이보다 더 큰돈을 날린 것이다. 최씨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불황(不況)의 그늘이 점점 짙어지는 요즘 서울중앙지법의 즉결심판 법정은 서민들의 한숨으로 채워지고 있다. 경범죄로 피고인석에 선 사람들이나 벌금을 부과하는 법관들이나 표정은 다른 때보다 어두웠다.
◆일당보다 많은 벌금
매일 오전 9시30분, 즉결심판 법정에는 30여명의 범법자들이 모인다. 경미한 위법행위가 적발된 사람들이다. 경찰이 즉결심판을 청구하면 법원은 2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과료 처분을 내리게 된다.
여러 유형 가운데 광고지 무단부착, 노점, 차량 번호판 가리기 등은 '생계형' 즉결(卽決)로 분류된다. 즉결재판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관은 "전체 즉결심판의 60~70%는 될 것"이라며 "이들에게는 통상 하루 벌이보다 많은 5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고 했다.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옷과 신발을 팔다가 법정에 오게 된 주부 유모(60)씨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다리절단 수술을 앞둔 남편을 집에 두고 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좌판이나 노점은 대부분 불법이다.
"벌금 3만원."(판사)
유씨는 "7~8개월을 쉬다가 2~3만원 더 벌어보려고 나왔는데…. 수술하면 간호하느라 장사도 못하는데 어쩌면 좋아요"라고 말했다.
◆다양한 생계형 즉결심판
지난해 4만9968건이었던 즉결심판 처리 건수는 올해 9월까지 4만4215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광고지 무단부착은 즉결심판 청구 사유 중 가장 많은 유형이다. 관할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아무 곳에나 붙일 경우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처벌된다. 단속 기관인 경찰과 구청에 적발돼 즉심으로 넘어오는 건수가 하루 30여건의 즉심 중 10건이 넘을 때도 있다.
주부 김모(42)씨와 정모(36)씨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나란히 법정에 섰다. 김씨는 "중학교에 다니는 딸 아이 학원비라도 마련해 보려고", 정씨는 "아내가 운영하는 학원이 어려워서" 광고지 부착 아르바이트에 나섰다고 했다. 벌금 5만원.
판사는 김씨에게 "경제 사정이 어려워도 지킬 건 지켜야죠. 학원비 벌려다 더 손해만 보지 않았습니까"라고 충고했다. 김씨는 "시간당 5000원 벌어보려다 10배를 물게 됐다"며 법정을 나갔다.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 홍보 포스터를 무단 부착한 극단(劇團) 단원이나 아르바이트생도 즉결심판정의 단골손님이다. 초범에게는 벌금 5만원, 재범(再犯)에게는 벌금 10만원이 선고되기도 한다.
노점 차량 번호판 가리기도 '생계형' 즉결의 대표적인 경우다.
서울 역삼동 노상에서 '뻥튀기'를 팔던 정모(69)씨는 차량 번호판을 가린 채 장사를 하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관할 구청차량의 카메라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선고 전, 판사가 "하루 얼마 버세요?"라고 묻자, 정씨는 "한 3~4만원 됩니다. 할 말 없습니다. 제가 잘못했는데요 뭐…"라고 답했다.
판사는 "사정 딱한 건 알겠지만, 또 장사하는 것도 좋지만 번호판까지 가리면 안 되겠죠. 피고인을 벌금 5만원에 처합니다. 다시는 오지 마세요"라고 선고했다.
◆형편 어려운 피고인에겐 선고 유예도
이런 판사의 처분이 내려지기까지는 한 사람당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재판부는 그만큼 짧은 시간 안에 적절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때론 온정이 베풀어진다.
주부 류모(48)씨는 남편도 병상에 있고 중2·고2인 아이들 학비 때문에 광고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걸렸다. 재판정에 서자마자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한 류씨는 "다른 직업을 구하려 해도 나이가 있다고 안 써주니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또 하실 겁니까?"라고 판사가 묻자 류씨는 침묵했다.
"대답을 안 하시는 게 정답일 수도 있겠습니다. 피고인에게 벌금 5만원을 선고하고, 그 형의 선고를 유예합니다. 법정에서 판사를 다시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선고유예를 내린 형사31단독 이재신 판사는 "짧은 시간 안에 정확히 판단해야 하는 즉결심판에선 때로는 피고인의 개인 사정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