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민족 의식은 한국에 배타성과 편협성을 가져왔고, 사상적 빈곤을 낳았으며, 정치적 독재를 도왔다."
재미 사회학자 신기욱(49)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한국의 민족주의에 던지는 고발장은 준열하다. 민족주의는 식민지 해방과 근대화·민주화를 이룩하는 데는 기여했으나, 그에 못지않은 대가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자유주의를 압도하면서 자유주의 기반이 약한 보수는 독재를 지지했고, 진보는 정권과 민족주의 선명성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친북·반미로 기울었다고 했다. 그는 "단군 신화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얘기도 했다. 동남아 신부가 포함된 다문화 가정이 늘어가는데, 단일민족 신화로는 이들을 껴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2006년 영어로 펴낸 《한국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창비)를 최근 우리말로 출간한 신 교수는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것보다 문화적·종족적 다양성과 관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족주의가 남·북한의 독재와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지적은 당혹스럽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파시즘적인 경향과 전체주의를 띠고 있다.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체제에는 개인보다 민족·국가를 우선하는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 일본 교과서 문제나 독도 문제가 터지면 일본을 규탄하는 것 이외에는 이견(異見)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얘기를 하면 반(反)민족적이라고 욕먹는다.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주도한 것은 일본계 3세인 마이크 혼다 의원이다. 뉴욕타임스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한 오니시 노리미쓰 기자도 일본계 캐나다인이다. 한국인 출신 중에서 누가 그렇게 한다면, 민족반역자란 소릴 듣지 않겠는가."
―한국 보수의 자유주의 빈곤이 민족주의 때문이라는 지적은 독특하다.
"서구의 보수는 자유주의의 기반을 갖고 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에 들어온 자유주의는 제국주의가 침입하는 시기와 겹치면서 민족주의에 압도당했다. 이 때문에 사상적으로 빈곤해지고 다양성이 줄어들었다."
―2002년 효순·미선양 사망 사건과 작년 미국산 쇠고기로 촉발된 촛불시위처럼, 한국 사회의 갈등은 합리적 절차에 따라 해결되기보다는 대규모 시위로 번진다. 신 교수는 이렇게 갈등이 격렬해지는 원인으로 민족주의를 꼽았다.
"서구의 연구 성과는 종족(ethnic) 민족주의가 민족 간에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조정이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같은 민족 내부의 갈등이 심각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같은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이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남·북한은 과거 체제 경쟁을 하면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의 좌·우파도 북한 문제와 한·미 동맹을 둘러싸고 좀처럼 타협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들을 합리적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주의와 연관된 정체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를 반(反)민족적이라고 몰아붙이면, 갈등이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를 폐기할 수는 없고, 보편적·시민적 자유주의로 보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한국은 이미 단일민족 사회가 아니다. 100만명 넘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고, 농촌에는 동남아 출신 여성들이 아내와 엄마로 다문화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런 현실과 의식의 간격을 메우려면, 핏줄을 기준으로 삼는 게 아니라 이들을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동등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저(低)출산으로 인구가 줄고 있는 한국 사회가 성장 동력을 유지하려면 핏줄에 호소하는 민족 정체성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단일민족 전통의 뿌리인 단군 신화는 폐기해야 한다는 뜻인가.
"단군신화는 일제와 맞서야 했던 식민지 시기나 1960·1970년대 남·북한 체제 경쟁을 하던 시대라면 몰라도,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통일을 위해서라도 민족주의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민족주의가 통일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를 진행하는 것은 방해한다. 중국 동포도 같은 핏줄이라고 하면서 2등 국민처럼 차별하는데, 통일 후 북한 주민들은 어떻겠는가. 이들이 국가 구성원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시민적·보편적 자유주의를 확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 교수의 정치적 입장은 무엇인가.
"난 오바마에게 투표한 민주당 지지자다. 그러나 지금 대학에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 입장과 무관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일한다. 한국에서 나를 '진보 대(對) 보수'의 프레임으로 분류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한국에선 진보·보수 지식인이 좀처럼 한 테이블에 않지 않는다.
"미국의 우리 연구소에서 한국의 사회통합을 실험하고 있다고 농담 삼아 말한다. 매년 한국에서 10명 정도 방문연구원으로 오는데, 보수·진보 양쪽이 다 포함돼 있다. 의견과 입장이 다르다고 서로 토론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신기욱 교수는
신기욱 교수가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9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나온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Colonial Modernity in Korea·2006년 삼인 번역 출간) 덕분이다. 마이클 로빈슨 인디애나대 교수와 함께 펴낸 이 책은 일제시대를 보는 관점으로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맞서던 국내 학계에 민족주의와 식민주의가 근대성으로 가는 헤게모니를 놓고 '경쟁'하는 모습에도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식민지 근대성(Colonial Modernity)'이라는 새 시각을 선보였다. 2001년 스탠퍼드대에서 한국학 전공자로는 처음 종신교수 자리를 얻었으며 현재 이 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올 연말 스탠퍼드대에서 한·미 동맹을 다룬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