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26)씨는 부산의 한 3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2007년 11월부터 부산 영도의 STX 조선소에 취직했다. 그는 퇴근 후 영어학원에 직행한다. 4년제 대학에 편입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지만, 공고에 다니던 10년 전만 해도 그는 가족과 스승을 애태우는 속칭 '날라리'였다. 성적은 전교 1~2등을 다퉜지만, 학교가 파하면 친구 8~9명을 자기 집에 몰고 가서 소주를 마시거나 다른 학교 학생들과 주먹다짐을 벌였다. "공부를 잘해도 가난해서 대학에 못 간다"는 좌절감이 그를 짓눌렀다.
이씨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거액의 카드빚을 남기고 잠적했다.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요양원에 들어갔다. 고등학생이었던 누나(27)가 야간에 호텔 바텐더로 일해서 벌어오는 월급 40만원으로 할머니와 셋이 살았다.
이씨는 고3 때인 2001년 3월, '꿈·희망·미래재단(이사장 김윤종)'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희망'을 되찾았다. 이씨를 눈여겨본 모교 교사가 재단에 이씨를 추천했다. 이씨는 "그때 처음 '내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꿈을 가졌다"며 "장학금을 받은 뒤 생활이 변하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다.
꿈·희망·미래재단은 2001년 재미 사업가 김윤종(60)씨가 만든 장학재단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도미(渡美)해서 광케이블 제조업체를 창업했다. 1999년 사업체를 프랑스 기업에 20억달러에 매각하고 장학사업에 몰두해왔다. 지난해에만 한국, 중국, 네팔 등에서 모두 504명에게 장학금 16억원을 지급했다.
보통 장학재단들과는 달리, 이 재단은 '성적'이 아니라 '자립 가능성'을 지원 기준으로 삼는다. 김 이사장은 "공부를 하면 더 나은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더 나은 직업을 가지면 가족 전체의 인생이 나아진다"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가장 효율적인 것이 장학사업"이라고 했다.
이 재단은 고등학교 때부터 장학금을 댄다. 고등학생을 지원하면 같은 돈으로 대학생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년이 올라가면 장학금 액수를 줄인다. 자립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김 이사장은 "고생해 본 사람이 생존력도 강하고 다른 사람 처지도 잘 이해한다"고 했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급한 불을 끌 수 있도록 장학금과 별도의 '긴급 생활비'도 지원한다. 우환이 해결돼야 학생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장학생을 선발한 뒤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고등학교 장학생은 국어·수리·외국어 중에서 하나 이상 1등급을 받고, 나머지 둘은 2~3등급 이상을 받아야 대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대학생은 B학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올해 숙명여대에 입학하는 임지혜(19)양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꿈·희망·미래 재단에서 1년에 260만원씩 장학금을 받았다. 임양 가족은 외조부모, 부모, 임양 남매 등 여섯 식구다. 이들은 임양 아버지가 1t트럭으로 녹즙과 야채를 배달해서 한 달에 200만원씩 버는 돈으로 먹고살았다.
임양은 "오빠 대학 등록금 대기도 힘들어 하시는 부모님께 차마 참고서 사달라는 말이 안 떨어졌다"며 "장학금을 받은 뒤 '남의 돈으로 공부하는 거니까 더 열심히 하자'고 결심했고, 실제로 모의고사 수리·외국어 영역 성적이 2~3등급에서 1등급으로 올랐다"고 했다.
고3 때부터 장학금을 받은 대학생 이정대(26)씨는 "처음엔 '전액을 주면 더 편하게 공부할 텐데'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상을 더 많이 배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재단은 장학생들에게 "취업한 지 1년이 지나면 1달에 최소 1만원 이상을 기부하라"는 약속을 받는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3년 동안 기부 약속을 하고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은 87명이다. 이 중 32명이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재단측은 앞으로 졸업생들이 자리를 잡으면 기부 참여율이 70%를 넘길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이사장은 실향민 할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밤에는 촛불 켜고 공부했고, 등록금을 못 내서 복도에 서 있곤 했다. 그의 모교인 서강대는 17일 김 이사장에게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했다. 서강대 손병두 총장은 "김 이사장은 사업가로도 성공했지만, 자선 사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나는 젊은이들이 넘을 수 없는 고통을 만날 때 잠깐 등을 밀어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