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태어난 상범이, 아니 김범은 동성친구 민호(김혜성)도 스스륵 녹게 만드는 미소의 소유자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장면.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범이는 민호에게 선언한다. “나야, 아님 유미야.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보통의 상황이라면 민호는 “제정신이냐? 당연히 여자친구 유미지!”라고 일갈하고 말았을 게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긴 생머리에 빼어난 몸매 자랑하는 ‘얼짱’인데도 불구하고 민호는 갈등한다. 범이냐, 유미냐. 그것이 문제로다.
대사가 뭐 필요 있나, 씩 웃어주면 끝나는 것을
웃을 때 쏙 들어가는 보조개. 날카로운 눈매 끝 작렬하는 눈웃음. 모공 따윈 확인할 수조차 없는 피부. 한데도 소년은 어째 자기가 누구보다도 잘생겼다는 사실을 알지도 알려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는 그저 공기보다 가벼운 웃음 에너지로 시트콤을 패러디의 전당으로 뒤집어 놓는가 하면('거침 없이 하이킥') 지나치게 심각한 나머지 5분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터지는 드라마('에덴의 동쪽')에까지도 무심한 웃음 한 방을 쏘아 올리며 청춘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김범은 애시당초 처음부터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의외로 웃기는' 캐릭터 또는 '진지한 대사를 읊는 것보다 무심하게 씩 웃어주는 게 더 효과적인' 배우로 태어난 것이다.
발리 범, 그 때 참 큰 웃음 주셨는데
김범을 추종하는 많은 팬들은 지금도 '거침 없이 하이킥'에서 그가 느닷없이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을 패러디 했던 순간을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다. 여자친구와 점점 더 친해진 나머지 자신이 못 들어오도록 방문을 닫아건 민호. 평소 아무데서나 민호를 껴안기를 서슴지 않던 샤방샤방한 성격의 범이는 이 순간 난데 없이 좌절의 화신으로 돌변해 수정(하지원)을 보내면서 끄억끄억 울음을 토하는 재민(조인성)을 연상시키는 연기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범이가 주먹을 입에 틀어막고 방문 앞에서 울어댈 때 시트콤을 보던 시청자들은 배꼽을 잡고 뒹굴어야 했고, 그렇게 '발리 범'은 잊을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지금도 인터넷 캡쳐 사진이 되어 떠돈다.
"멀쩡하게 생긴 애가 저렇게 웃기냐." 결국 김범이란 인물이 주는 '반전효과'는 바로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게다.
꽃보다 범이, 넌 무심하고 우린 눈물겹다
KBS 2TV '꽃보다 남자'에 열광하는 수많은 시청자가 주인공 '구준표'(이민호)보다 곁에 말 없이 서서 눈빛을 쏘아주고 마는 김범에게 탄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범이란 배우는 말을 아낄 때, 비뚜름한 웃음 한 번 웃어줄 때 이미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필요충분조건' 같은 존재니까. 어쩌면 김범은 재벌 2세 소이정을 연기할 때도 그저 하늘 한 번 쳐다본 후 도자기 한 번 쓰다듬고, 구준표가 소리 지를 때 황당해 하는 미소 한 번 날리는 것만으로 필요한 모든 연기를 다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 일본 원작만화 속에선 평면적인 '도련님' 같은 캐릭터에 지나지 않았던 소지로는 바람둥이 아버지가 남긴 유년시절의 상처를 애써 덮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소이정'으로 재탄생 했으니 말이다.
많은 드라마 마니아들이 드라마 속 소이정과 추가을 커플의 알쏭달쏭한 연애감정에 열광하면서도, 두 사람의 만남이 무조건 해피엔딩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도 이 때문. 김범이란 연기자는 누군가의 ‘남자친구’로 살아가는 모습을 충실히 연기할 때보다, 공기보다 가벼운 바람둥이가 되어 ‘해피엔딩’의 언저리만 맴돌아도 이미 충분하니 말이다.
그래서인가. 김범이 ‘꽃보다 남자’ 속에서 느닷없이 구준표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자기 여자를 제대로 지킬 줄 아는 게 남자다운 거라고 네가 말하지 않았었냐?”라고 느닷없는 설교를 토해내는 열연을 펼칠 때 드라마는 느닷없이 ‘산’으로 향한다.
느닷없는 진지함보단 장난기 넘치는 웃음, 주절주절 장황한 설득보단 무심한 듯 툭 던지는 “가자!” 한 마디. 누나들의 가슴이 쿵 주저앉는 순간은 바로 그런 ‘범이’를 TV 화면 속에서 만날 때다. 그러니 범아, 무르익은 연기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일단 한 번 더 웃어나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