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다시 찾은 연길(延吉) 거리를 바라보다 덜컥 의심이 들었다. 즐비한 고층 건물과 요란한 간판, 10배 가까이 늘어난 자동차 행렬이 분명한 옛 기억을 향해 "진짜냐"고 자꾸 뒤흔드는 것이었다. 만주 특유의 잿빛 이미지는 그대로였지만 연길은 그만큼 달라져 있었다.
1992년 한중(韓中)수교 이후 중국 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 가운데 하나가 연길을 포함한 연변조선족자치주다. 통계에 따르면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에 사는 조선족은 전체 240만명 가량이다. 이 가운데 조선족이 가장 많은 길림성 연길의 인구는 작년 말 기준으로 49만5130명이며 조선족은 57.93%인 28만6806명이다.
이 중 한국으로 건너와 일하는 전체 조선족은 합법체류자(36만2920명·2008년 기준)·불법체류자(2만7207명)를 포함해 40만명에 육박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치까지 감안하면 그 이상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연길에는 "한 번쯤 한국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옮겨 온 만큼 한국과 연길의 관계는 가깝다. 가리봉동이 서울에서 '구로구 연변동'이라 불리듯 연길 경제는 한국 경제에 연동돼 있다. 월 100만원을 버는 근로자 1인당 연 600만원만 연길로 송금해도 연간 2조4000억원이 흘러 들어간다. 그것이 연길 성장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북국(北國)의 도시답게 연길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밤은 연길이 품고 있는 속살을 보여준다. 중국 내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많다는 노래방이 기지개를 켜고, 그곳에서 1인당 맥주 소비량 1위 기록이 매년 경신되고 있다. 취객(醉客)을 실어 나르느라 늘어난 시민 1인당 택시 수 역시 중국 1위다.
그런데 연길을 포함한 조선족자치주에서 최근 중국 내 1위로 치솟은 기록이 또 하나 있다. 놀랍게도 그것은 조선족 특유의 문화와 배치돼 보이는 이혼율 1위다. 중국 연길시 인민로 주변 다방에서 만난 김보화(31·가명)씨는 밤마다 일대 다방에서 돈을 번다고 했다.
주인이 전화로 부르면 1~2시간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50~70위안), 노래방에 동행한다는 것이다(100위안). 가끔 '2차'를 할 때는 꽤 수입이 짭짤해진다고 했다. 그는 "남편이 헤어지자고 해 7살 난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했다.
한인(韓人)들이 찾는 호텔 밀집 지역에서 다방을 경영하는 박미란(38·가명)씨는 "밤마다 이 일로 생계를 잇는 여성이 40~50명가량 된다"며 "과거에는 20대가 많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30~40대 이혼녀들"이라고 했다. 그는 "한 업소에서 다른 업소로 휴대전화로 연락이 오면 건너오기도 한다"고 했다.
늘어난 이혼율과 한국에서 건너온 밤의 유흥(遊興)이 어우러져 빚어낸 합작품이 '마사지'다. 중국에서 마사지 숍을 보는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과히 어렵지 않다. 문제는 전통적인 중국식 마사지가 외면받는 대신, 그 자리를 한국식 퇴폐마사지가 채운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중국식 마사지(70분 100위안) 대신 '소금 마사지'(60분 150위안)가 인기다. 소금 마사지는 목욕탕에서 때를 벗긴 후 소금을 잠시 뿌렸다가 물로 씻어낼 뿐 영락없는 퇴폐 마사지다. 자신을 '6번'이라고 밝힌 20대 여성은 "한국에서 건너왔는데 이제는 조선족이 더 즐겨 찾는다"고 했다.
이곳 시민 김기중씨에게 이혼율이 치솟는 까닭을 물었다. 그는 가장 큰 이유로 "한국문화를 경험하고 온 부부들이 연길에 와서는 서로 참지 못하고 갈라선다"고 했다. 이혼 증가는 출산율 감소와 가임(可妊) 조선족 여성의 해외유출과도 관계 있다. 조선족 여성은 한해 2000명 이상이 국외 혼인을 하는데 주로 한국남성과 결혼한다고 한다.
이혼은 이런 문제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붕괴로도 이어진다. 연길을 포함한 조선족자치주는 부, 모 혹은 부부가 한꺼번에 한국으로 가 길게는 10년 넘게 일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자녀들이 의탁된다. 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헤어지기 이전부터 여러 문제를 낳고 있는데 부모 이혼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문제아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연길의 한 목사는 무차별로 수입되는 드라마를 주범(主犯)으로 꼽았다. 그는 "내가 '막장 드라마'라는 단어를 알 만큼 폐해가 심하다"며 "하나같이 정신이상자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소재"라고 했다. 그는 "조선족이 방송을 보면서 '저럴 수 있느냐'고 혀를 차지만 다시 그 방송을 본다"고 했다.
그는 "위성 안테나를 이용한 한국 드라마 시청 후 조선사람들이 100년 넘게 지켜온 고유의 문화, 가족 윤리, 성 윤리가 일거에 망가졌다"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막장 드라마 작가들은 민족 반역자에 가깝다"고 흥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부터는 한국 발(發) 경제불황의 직격탄이 가뜩이나 우울한 연길 경제를 뒤덮고 있다. 고(高)환율 파동으로 송금액수가 줄어든 것이다. 아들 부부가 한국에서 9년째 일하고 있는 김복순(69) 할머니는 "몸은 자꾸 아프고 맡아 키우는 손자는 계속 말썽을 부리는데 돈마저 오지 않는다"고 했다.
연길 경제는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한국은 고뿔 걸린다'는 80년대식 우스개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작년 대비(對比) 집값이 10% 넘게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연길의 강남(江南)이라 할 하남(河南)지구의 신축 아파트(32평형)는 작년 한화 5000만원 수준에서 500만원 넘게 떨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연길 시내를 돌아다녀보면 문을 닫은 상점의 수가 10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늘었음을 알 수 있다. 화룡지역에서 거주하는 김철형씨(43)는 "1차 직격탄을 맞은 게 한국인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숙박업소"라며 "농촌지역과 달리 도심 거주 젊은이들의 상당수는 실업자"라고 했다.
한국인을 겨냥해 늘어난 택시도 손님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개인택시를 모는 하창호(48)씨는 "하루에 손님 20명 태우기가 벅차다"고 말했다. 그는 "교통량이 늘어나 사고는 늘어난 대신 관광객은 줄어 손님만 보면 순식간에 서너 대의 택시가 경쟁을 벌인다"며 "한달 생활비를 버는 게 너무 벅차다"고도 했다.
기자가 머문 코스모호텔 인근의 새벽 인력시장에는 한파가 몰아친 일요일인 22일에도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들은 대개 잡역, 가정부 일을 하며 하루 30위안 정도를 받는 저소득근로자들이다. 30위안은 이곳에서 두끼 식사를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의 액수라고 한다.
연길에서 특징적인 것은 '타자수(打字手) 구함'이라는 구인광고가 유달리 많다는 점이다. 예용범 목사(일산제일교회)는 "타자수라는 게 거의 인터넷 음란채팅을 하는 인력을 뜻한다"고 했다. 연길 중심부에서 목격한 구인광고에는 보모(保姆)나 가정부 다음으로 타자수가 많았다.
1990년대 초 시작된 백두산(白頭山) 관광 붐과 뒤이은 인력 수출 다음에는 한국인들의 직접 투자도 이뤄졌다. 문제는 이 직접투자의 대부분이 생산설비가 아닌 식당 같은 소비산업 투자라는 점이다. 연길 시내에는 한국인이 직접 경영하는 음식점만 400곳이 넘는데 대개 한화 1억원 이상의 과잉투자를 회수하지 못해 곤욕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혼율 증가, 가정 파괴, 경기 불황에 따른 구직난은 가뜩이나 빨라진 조선족의 '탈(脫)연길'을 부추기고 있다. 탈연길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의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칭다오(靑島)처럼 한국인들이 많은 대도시로도 파급되고 있다.
과거 조선족자치주 내에서 조선족 비율은 최고 63%에 달했다. 이 수치는 10년 전 48%로 처음 절반을 밑돌더니 최근에는 39%로 계속 내려앉고 있다. 실제로 조선족자치주 가운데 돈화, 안도, 왕청 같은 지역은 거주 인구의 절대다수가 한인(漢人)이다. 조선족사회에서는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머지않아 자치주는커녕 자치시(市)나 자치현(縣)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고 있다.
조선족 학자 곽승지는 '동북아시아 시대의 연변과 조선족'에서 "2050년이면 조선족 인구가 50만 명으로 줄고, 21세기 말에는 19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조례 제1장 2조는 "자치주는 길림성(吉林省) 관할 구역 내의 조선족 인민이 구역 자치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자치주 성립 요건으로 조선족 비율이 얼마여야 하느냐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지만 비중이 현저히 낮을 경우 주가 시(市)나 현(縣) 또는 진(鎭)으로 강등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연길의 한 병원 운영자는 이런 추세에 대해 "생산시설 대신 소비시설에만 투자가 집중돼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유인책(誘引策)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차라리 연변과학기술원 같은 우수한 대학이나 중국의 부유층을 겨냥한 대형병원 신축이 오히려 바람직해 보인다"고 했다.
그는 "조선족들의 직업에 대한 기대수치가 높아져 한국식당 종업원 대부분이 한족들로 채워지고 있다"며 "서시장(西市場)의 K음식점처럼 민족의식이 있는 경영자가 운영하는 곳은 한복을 착용한 조선족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지만 그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번 맛본 '자본주의'와 '돈'의 맛은 한국에서 돈을 벌어 귀국한 조선족의 2차 탈출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연길로 돌아오면 특별한 수입원이 없어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이 축나는 것을 보면서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너지는 조선족 내부 못지않게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은 중국 중앙정부의 은근한 조선족 억제책이다. 중국은 1992년 한중 수교 후 연변지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출입이 잦아지자 4년 뒤인 1996년 중국사회과학원 핵심 과제로 고구려 연구를 지시했다. 이른바 '동북공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연변지역에서 고구려, 발해의 흔적이 지워지고 대신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와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용정(龍井) 주변에는 발해시대 왕과 공주의 무덤이 산재한 고성촌(古城村)이 있다. 이 주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 가구에 최근 "다른 곳에 집을 줄 테니 이사하라"는 압력이 내려왔다고 한다.
한인들이 자주 찾는 해란강 주변 일송정(一松亭)도 흉물스럽게 변했다. 일송정 바로 밑에 한인관광객을 겨냥해 세운 커피숍과 음식점은 문을 닫은 채 을씨년스럽게 방치돼 있으며 일송정 앞에 시(詩) '선구자'를 세워놓은 비(碑)는 어느 사이엔가 그라인더로 싹 갈아 없애버렸다.
'선구자'를 대신해 새겨진 것은 '용정찬가'다. 한 조선족은 "한국사람들이 이곳에만 오면 선구자 노래를 부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중국인들이 5년 전에 없앤 것"이라고 했다. 이곳을 찾았을 때 일송정 기둥은 청소년들이 남긴 낙서로 뒤덮여 있었으며 주변에는 맥주 깡통이 나뒹굴고 있었다.
연길 교외 동남쪽에 있는 성자산성을 조선족들은 누구나 고구려산성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새로 세워진 표지석에는 고구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용정 인근 선구산성도 1990년대 이후 갑자기 '금나라가 세운 것'으로 둔갑했다고 한다. 그 결과 "요즘의 조선족 아이들은 고구려와 발해가 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TV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만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지어 연길에서 200㎞가량 떨어진 백두산 관광지구에도 한인을 위한 한글안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지(聖地)로 추앙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취한 조치로, 이면에는 "중국인 관광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게 조선족 사회의 분석이다.
하지만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는 "한국인들이 술김에 '만주 땅은 우리 것'이라는 식의 구호를 외치는 게 중국 중앙정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측면도 있다"며 "즉흥적인 감 상주의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