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가미 신사 소장 수월관음도가 14년 만에 전시를 위해 고국에 온다.
(동아일보 3월 14일자 보도)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불화(佛畵) 중 최대 작품은 일본 규슈(九州) 가라쓰시(唐津市)의 가가미 신사(鏡神社)가 소장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세로 4.19m, 가로 2.54m의 규모다. 강우방 전 이화여대 교수는 "처음 본 순간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던 가장 아름다운 고려 불화"라고 했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한 차례 전시됐던 이 작품이 다시 고국에 온다. 경남 양산시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이달 30일부터 6월 8일까지 여는 특별전 때문이다. 이 대작(大作)은 왜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일까?
최근 논문 '가라쓰 가가미 신사 소재 고려 수월관음도의 유래'를 탈고한 이영(李領) 한국방송대 교수(일본중세사 전공)는 "그림에 얽힌 사연을 알기 위해서는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던 14세기 초의 상황으로 시곗바늘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측 기록 '측량일기'에 의하면 이 그림은 서기 1310년(충선왕 2) 숙비(淑妃)의 지시로 네 사람의 화가가 함께 그렸다. '숙비'란 고려 26대 임금 충선왕(忠宣王·재위 1298, 1308~13)의 후궁인 숙비 김씨(金氏)다.
숙비는 젊어서 한번 시집을 갔다가 과부가 됐는데 충선왕이 세자 시절 아버지 충렬왕(忠烈王)을 위해 그녀를 후궁으로 올렸다. 문제는 1308년 충렬왕이 죽은 뒤에 일어났다. 장례가 끝나자 충선왕은 아버지의 후궁인 숙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은 것이다. '고려사'는 "비(妃)가 밤낮으로 온갖 아양을 다 부리니 왕이 혹해 친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때 충선왕은 만 33세였고 숙비는 서너살 연상이었다. 숙비는 오빠인 김문연(金文衍)을 출세시키며 내정과 외교에서 영향력을 키워 갔다. 그런 그녀에게도 커다란 경쟁자가 있었다. 숙비가 충선왕과 처음 동침하기 3일 전에 후궁이 된 순비 허씨(順妃許氏)였다.
숙비 김씨와 순비 허씨의 사이가 나빴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는 데 있었다. 둘 다 빼어난 미모였고 동시에 충선왕의 여자가 됐다. 명문 집안 출신인데다 나이도 비슷했다. 두 여인이 한 연회에서 다섯번이나 의복을 갈아입으며 서로 옷차림을 뽐냈다는 기록도 있다. 선수를 친 것은 순비였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 원나라의 황태자비가 돼 있었는데, 사위에게 청해 숙비를 원나라로 소환하도록 한 것이다.
1309년 중랑장 윤길보(尹吉甫)가 황태자를 설득해 소환은 취소됐지만 숙비는 왕실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녀는 종교적인 권위를 세우는 방법을 택했다.
1309년부터 1311년까지 개경 인근에 대규모 사찰인 민천사(旻天寺)와 흥천사(興天寺)가 건립됐는데, 당시는 충선왕과 왕후(본처)인 계국대장공주가 원나라에 가 있었던 시기이므로 왕실에서 최고 지위를 지닌 데다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던 숙비가 그 공사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녀가 '수월관음도' 제작을 지시했던 1310년은 바로 이 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숙비는 '수월관음도'를 과연 어디에 두었을까? 이영 교수는 ▲당연히 절이었을 것이고 ▲남편인 충선왕과 관련된 장소였을 것이며 ▲관음보살의 영장(靈場·신성한 장소)인 바닷가 근처에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곳은 충선왕의 초상화가 안치돼 있었으며 예성강 하구와 가까웠던 흥천사밖에는 없다.
'측량일기'는 '수월관음도'가 가가미 신사에 바쳐진 취지를 기록한 글이 1391년(공양왕 3)에 쓰여졌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수월관음도'는 1310년과 1391년 사이에 발생한 '어떤 사건'에 의해 흥천사에서 일본으로 옮겨진 것이 틀림없다.
이제 '고려사'의 기록 한줄이 그 해답으로 떠오른다. 1357년(공민왕 6) 9월 26일의 기록이다. "왜구가 승천부의 흥천사에 침입해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다." 가가미 신사의 '수월관음도'는 물론, 대마도 다구쓰다마(多久頭魂) 신사의 대형 청동 징, '금자(金字) 묘법연화경' 등의 숱한 문화재들이 모두 이때 도둑맞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영 교수는 "14세기 말의 왜구는 가난한 어민 출신의 도적떼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규슈의 토호 세력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의 지휘 아래 군량미와 물자를 얻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반도를 침공했던 숙련 무사의 테러집단이 '왜구'였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 불화 120여점 중 국내에 있는 것은 10여점뿐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