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GDP가 312달러(2008년 기준)인 말라위는 남부 아프리카 내륙의 빈국이다. 수도 릴롱궤 한복판에서 5층 이상 건물을 찾기 어렵고 전기 배급도 어려워 밤에는 대통령 궁과 특급 호텔 등을 제외하면 불빛조차 희미하다. 하늘에 있는 은하수가 보일 정도다.

그런데 릴롱궤 일대에 뜻밖에도 한국인 교민 25가구 70여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왜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일까? 현지 교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조오행(73)씨가 공영토건의 일원으로서 말라위로 오게 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월남전이 끝날 무렵 베트남에 진출해 있던 한국 건설업체들은 중동 등 다른 곳으로 옮겨 공사 입찰을 따내고 있었다. 공영토건은 베트남에 있던 장비를 아프리카로 가지고 와 건설 사업을 하게 됐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 중에서도 왜 말라위였을까?

말라위 수도 릴롱궤의 카무주 국제공항. 한국인들이 1970년대에 건설한 말라위의 건물 중 하나다.

당시만 해도 잠비아·짐바브웨·모잠비크 등의 주변 국가들은 모두 친(親)공산주의 국가였다. 우리와는 수교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남부 아프리카에서 우리 건설업이 진출할 수 있었던 곳은 1965년에 한국과 수교했으며 친서방 노선을 걸은 말라위가 거의 유일했다.

한국인들은 1975년 1월 릴롱궤와 북쪽 도시 카숭구를 잇는 간선 포장도로의 공사를 693만달러에 수주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정부종합청사와 카무주(Kamuzu) 국제공항, 최고급 숙박시설인 선버드 캐피탈 호텔 등 릴롱궤의 주요 건물들이 당시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건설됐다.

1980년대 초 해외건설 경기가 수그러들면서 한인 상당수가 귀국했다. 그러나 조씨 등 몇 가족은 그대로 말라위에 눌러앉았다. "여기서 새 길을 찾자"는 생각이었다. 1984년 릴롱궤에 우리 상주 공관이 세워졌지만 1992년 폐쇄되고 주짐바브웨 대사관이 업무를 겸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말라위에 남은 교민들은 대부분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숙박업체, 사진관과 담배회사, 박스공장 등 교민들이 운영하는 업체도 다양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선교사들이 교민 사회에 합류했다.

릴롱궤에서 숙박업과 식당을 겸한 '코리아 가든'을 운영하고 있는 조오행씨의 아들 성호(40)씨는 "다른 나라보다 경쟁이 심하지 않고 사업도 잘되기 때문에 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건비가 싸서 베이비시터를 구하기도 쉽고 자녀는 국제학교에 보낸다"고 했다.

릴롱궤 시내에서 현대·기아차나 삼성 휴대전화, LG 냉장고를 구경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국내 기업이 직접 진출한 사례는 거의 없고 대부분 딜러에 의해 한국 제품이 들어온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대양상선의 후원으로 릴롱궤에 대형 병원인 '대양누가선교병원'이 문을 열었다. 릴롱궤의 한국 식당 2곳 중 한 곳은 5년 전 문을 닫았고, 다른 한 곳은 양식과 중식으로 메뉴를 바꿨다고 한다. 말라위의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비슷한 숫자지만 대사관이 없는 한국과는 달리 릴롱궤 한복판에는 일본 대사관이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고층건물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