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의 술 마시는 풍류놀이 중 '남승도(覽勝圖)'란 게 있었어요. 커다란 종이에 전국 명승지를 적어놓고 대여섯 사람이 미인(美人), 어부, 승려, 한량, 선비 등의 역할을 맡아요. 주사위를 던져 자신의 역할과 관련된 명승지에 다다르게 되면 반드시 술을 마셔야 해요. 미인은 낙화암이나 진주 촉석루, 승려는 해인사나 통도사… 이런 식이죠. 이 놀이가 재미있는 건 미인이 먼저 가 있는 곳엔 승려가 가지 못하도록 하는 등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고 해요."
1987년과 90년 각각 내무부·건설부 장관을 지낸 이상희(77) 전 장관이 '술―한국의 술 문화'(도서출판 선)라는 2권짜리 책을 냈다. 1700쪽이 넘는 이 책에 그는 주법(酒法)과 주례(酒禮), 주기(酒器), 주호열전(酒豪列傳)은 물론 술 관련 풍류놀이까지 술집과 술에 얽힌 일화와 야화까지 모두 담았다.
이쯤 되면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애주가(愛酒家)로 알겠지만, 16일 기자와 만난 그는 "맥주는 한 병 마시면 과하고, 정종은 다섯 잔 마시면 버겁고, 소주는 두 잔 정도면 적당하더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주호(酒豪)에 끼기 힘든 그가 하필 '술 문화' 책을 낸 까닭이 있을까? 그는 "그동안 술과 관련된 책들이 대부분 서양 술을 다루고 있는 것이 이 책을 쓴 하나의 계기"라고 했다.
자료 조사에만 10여년, 집필에만 3년이 걸렸다는 이 책에는 술에 관한 1400여점의 그림·사진·도표 등이 실려 있다. 이 전 장관은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책과 그림 등의 자료수집이었다"면서 "특히 '부녀자의 음주 습속'에 대해 쓰면서 광복 이전에 술 마시는 여인을 그린 그림을 찾아보려 했으나 구하지 못했다"면서 아쉬워했다.
196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시작한 이 전 장관은 1998년 1500쪽이 넘는 '꽃으로 본 한국문화'를 펴내 화제가 됐으며 각종 고서(古書)를 포함, 10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는 애서가(愛書家)로도 유명하다.
그가 이 책을 쓴 궁극적인 목적은 잘못된 현대인들의 술 문화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그는 "우리 조상들은 술을 마시되 폭음하지 않았고, 술을 마심으로써 예술을 창조하는 등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고 했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리고, 음주 운전해 사고 내고…. 술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폭탄주'는 풍류를 모르는 것이어서 우리의 전통 술 문화와는 맞지 않는 것이죠."
그런 그는 한 번도 주사(酒邪)를 부린 적이 없었을까. "술을 처음 마신 게 고등학교 1학년 때 소풍 가서였어요. 친구들과 술도가에 몰려가 막걸리를 퍼마셨죠. 엉망으로 취해 논두렁에 쓰러져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자정이 넘었어요. 그 후론 술 마시고 꼴사나운 짓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