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씨랜드 참사' 10주기를 맞아 오는 29일 어린 자식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현장에 분향소를 차리고 합동위령제를 지내기로 했다.

본지 6월19일자 보도

벨을 눌렀다. "그런 사람 여기 없다"는 말이 들렸다. 실랑이가 오간 끝에 문이 열렸다. A(46·당시 소망유치원장)씨는 "평생 숨어 살고 싶었지만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했다. '씨랜드 참사' 때 숨진 유치원생 19명 중 18명이 그의 원생이다. 기자가 건넨 명함이 긴장한 그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A씨는 "나를 옹호하는 글도 싫다. 변명처럼 비칠까 무섭다"고 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다고 했다. 갓 100일 지난 늦둥이 딸이 인터뷰 내내 울었다. 엄마도 울었다.

"'재판 끝나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얼굴에 화상 흉터라도 남았더라면, 정신병자가 돼 사람 구실 못하고 살았더라면…'하고 생각해요. 지금 어쨌든 간에 나는 살아있잖아요…."

그는 '대형 참사' '안전 불감증' 같은 단어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는다고 했다. 이름을 잊고 산 지도 오래다. 누가 자신을 부르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란다. 신문도 TV도 일절 보지 않는다. 알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 알던 사람과도 교류가 끊겼다.

새카맣게 타버린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은 지금도 어른들의 부주의로 생을 일찍 마감한 어린이들의 속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당시 유치원장은 “언젠가는 유가족을 만나야 하겠지만 그분들이 나를 보려고 하겠느냐”며 유가족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걱정했다.

A씨는 "억울하지도 않다. 살아 있는 동안 유가족에게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라며 "죽을 때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요. 딸을 낳고부터는 돌아다니는 애들 보는 것도 더 가슴 아파요. 하나님을 찾기도 죄스러워 신앙도 포기했습니다." 그는 "남의 애들을 그렇게 해놓고 애 낳고 잘 산다는 말을 들을까 두렵다"고 했다. 평생 천직인 줄 알던 유치원 일도 접고 A씨는 집안에만 있었다.

당시 소망유치원 교사 4명 중 2명이 법정에 섰다. A씨는 금고 2년6월을 선고받았다.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였다. 유치원생 18명이 숨졌던 301호 인솔교사(당시 28세) 는 금고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유아에 대한 보호의무를 게을리 한 과실이 인정된다"고 했다.

수원 교도소에는 씨랜드 관련 기사만 오려진 채 신문이 들어왔다. 나중에 들어온 재소자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그는 '문을 잠가 놓고 술 파티를 벌인 나쁜 ×' 이 돼 있었다.

"저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기독교인이라 술을 전혀 안 마셔요. 유치원 교사 3명도 모두 기독교인이었어요. 진실이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 달라질 건 없겠지만요."

301호를 맡았던 자신과 인솔교사가 건너편 314호에 있던 것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는 "아픈 애들은 없는지, 연락 온 엄마들은 없는지 교사들과 이야기하는 자리였다"며 "교사 3명이 계속 들락날락했지만 눈 앞에서도 일이 잘못되는 게 애들인 점을 생각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당시 일부 유가족들은 A씨의 선처를 재판부에 호소하기도 했다. 면회를 오고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평생 서로 보는 일 없이 잊고 살아가자"는 내용들이었다. 그는 아직 그 편지들을 보관하고 있다.

"출소 후 저를 죽이든 살리든 유가족들을 한번 보려고 했어요. 근데 제가 그분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아직도 그분들 보기가 죄스러워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일괄적인 감형(減刑)이 있었다. A씨는 2001년 봄, 20여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서울 송파구에 있던 유치원은 사고 이틀 뒤 강동교육청에 의해 직권 폐쇄된 뒤였다. 부부는 친정이 있던 지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유가족 보상금에 대한 민사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이다.

소망유치원 교사 중 1명이던 B(31)씨는 원래 301호를 맡기로 돼 있었지만 옆방 교사와 바꿨다. 소망유치원생 42명은 두 개 방에 나뉘어 있었다. 당시 21살이던 B씨는 사고가 나기 4개월 전 소망유치원으로 발령받았다. 첫 직장이었다. B씨의 어머니는 "딸 하나 잃는 줄 알았다"며 "사고 후 충격으로 10일 넘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더라"고 했다. B씨는 모자를 눌러쓴 채 합동 영결식을 몰래 지켜보러 가기도 했다.

10년이 지났어도 가족들에게 사고 이야기는 금기(禁忌)다. B씨의 남편은 "결혼하고 나서야 장모님한테 들어 알았다"며 "아직도 아내 앞에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고 했다.

B씨는 현재 어린이집 교사 일을 하고 있다. 10년이 지났지만 야외 견학이나 현장 학습은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웬만하면 빠진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여러 어린이집을 전전해야 했다. 가족들은 "본인도 비슷한 일을 하기 매우 꺼려했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애초 하던 일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99년 수련원 가건물에 불… 유치원생 등 23명 숨져

1999년 6월 30일 새벽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서 불이 나 여름캠프를 왔던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해 모두 23명이 숨졌다.

소방당국은 모기향에서부터 불이 옮아 붙은 것으로 추정했다. 참사가 났던 수련원 건물은 컨테이너 박스 54개를 쌓아 올린 가건물 구조였다. 스프링클러나 소화전 등 소방설비도 전혀 없었다. 복도 양 끝에 있던 철 계단이 유일한 비상구였지만 캠프 파이어를 끝내고 잠을 자던 유치원생들은 화마(火魔)를 피하지 못했다. 301호의 서울 송파구 소망유치원생 18명 전원은 창문 쪽에 한데 엉켜 치아마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탄 채 숨졌다.

경찰조사결과 수련원 건물은 불법으로 용도와 설계를 변경하여 운영 허가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이후 수련원장과 유치원장을 비롯해 화성군청 공무원, 건축사 관계자 등 17명이 기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