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은 몸이 잡아당겨짐을 느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근육이 팽팽해지고, 흐르는 물처럼 뇌와 심장으로 곧바로 전달된 통증이 물결 치며 점점 더 강해졌다. 사마천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46세의 사나이 사마천이 지금으로부터 2108년 전인 기원전 99년에 남성을 거세하는 궁형(宮刑)을 당하던 장면이다. 당시 사마천이 느낀 고통을 다른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을까마는, 사마천과 같은 중국인이자 역사소설가인 가오광(高光)이 《소설 사마천》(전 2권)(허유영 역, 21세기북스)에서 재현해본 것이다. 풍부한 상상력을 자랑하는 가오광은 황제의 비위를 건드려 거세당하는 형벌을 받은 사십대 중반의 사관(史官)이 치욕을 극복하고 다시 붓을 드는 장면은 이렇게 재현해놓았다.
'사마천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거세된 후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흥분이었다.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그의 몸엔 미세한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피부가 고와지고, 근육이 말랑말랑해졌으며….'
사마천 본인은 사기(史記) 열전(列傳) 한구석에 써넣은 자신의 전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자신이 겪은 치욕과 그 치욕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태사공은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김원중 역 《사기열전》(전 2권), 민음사) … 죽음을 각오하면 반드시 용기가 생긴다.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처하여 어떻게 임하는가 하는 것이 진정 어렵다(소준섭 역 《사기》(전 2권), 서해문집) …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인류 역사의 아이러니는, 고난에 처한 인간이 고난을 극복할 때 반전(反轉)을 통해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는 것이다. 법칙은 양(洋)의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기원전 400년대에 30년간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냉철한 눈으로 인류사에 기록한 투키디데스(Thucydides)도 원래는 아테네 출신 장군이었으나 암피폴리스 방어전에 패배해서 추방당하는 치욕을 당했던 사람이다. 치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었고, 객관적인 필치로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그릴 수 있었다. 서양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원조로 평가받는 니콜로 마키아벨리(Machiavelli)도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실패한 외교관이자, 들통난 반(反)정부 음모가였다. 전쟁의 철학적 의미를 진단한 '전쟁론'을 쓴 칼 폰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도 프로이센군에서 도망쳐 러시아군에 투항한 실패자였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실패자들과 달랐던 점은 치욕에서 죽음으로 떨어지지 않고, 치욕을 당한 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냉철한 인간 이성에 다가갔다는 점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은 한(漢) 무제(武帝) 때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흉노에 투항한 장군 이릉(李陵)을 "투항하기는 했으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전과(戰果)는 어느 다른 장군들보다 훌륭하다"고 변호하다가 황제를 분노하게 만드는 역린(逆鱗)의 죄를 범한 때문이었다. 사마천은 자신이 궁형을 당한 이후 죽음을 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데 대해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주나라 문왕은 유리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역을 풀이할 수 있었고, 공자는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하게 됐고, 여불위는 좌천되는 바람에 여씨춘추를 전했으며, 시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들이 고난 속에서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사기(史記)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것은 그 이름이 주는 이미지, 즉 딱딱한 사실(史實)을 나열한 '히스토리(history)'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는 중국 고대의 역사 편찬기관이 펴낸 공식 역사서가 아니다. 인간 사마천이 자신보다 먼저 살다 간 인간들이 어떻게 살다 갔는지를 추적한 '스토리(story)' 모음집이다. 다만 황제들은 '본기(本紀)', 제후들은 '세가(世家)', 보통 사람들은 '열전(列傳)'이라는 항목으로 따로 분류해서 실어놓았을 뿐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각각의 스토리 말미에 '태사공(사마천의 관직명)은 말한다'고 품평을 하는 특권을 누렸다. 공자도 위대한 스승이긴 하지만 출신이 보통사람이므로 열전의 하나로 기록한 뒤 "높은 산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고, 큰길처럼 사람을 따라가게 한다"고 적었다. 열전에는 천하를 통일하는 진(秦)의 시황(始皇)이 될 사람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자객 형가(荊軻)도 있다. 살해 대상 인물의 신임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의 목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접근해갔지만 결국 살해에 실패한 형가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마천은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어찌 망령된 일이겠는가"라고 평가했다. 형가의 이야기를 현대 중국의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는 영화 '영웅'에서, "진시황의 위대함을 깨닫고 스스로 포기했다"고 엄청나게 왜곡했다.
여름휴가철이 시작됐다. 자신을 돌아보고 재정비할 여유를 겨우 얻을 수 있는 때이다. 실적을 제대로 못 내 승진에서 밀리고,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중요한 싸움에서 패배하고 역전 드라마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사기를 읽어보자. 거세당한 사마천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적인 유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화식열전(貨殖列傳)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고, 경영인을 위한 《사기의 경영학》(김영수 저, 원앤북스)도 출간돼 있다. 다만 사마천이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번씩 뒤틀리고 꼬이는 고통 속에서 써내려간 사기의 번역이나 재해석을, 원숙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역자와 저자들이 너무 과감하게 시도한 점은 감안해가면서 읽어야 할 듯싶다. 준엄한 완역본으로는 《사기》(전 7권)(정범진 외 역, 까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