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가 벌어지는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전의경 부대. 지휘관에게 욕먹고, 고참에게 핀잔 들으며 시위대에 맞서는 젊은이들이다.
이들 전의경의 고달픈 삶을 실감나게 그려낸 만화가 있다. 포털 야후의 카툰세상에 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노병가’다.
‘노병가’에 열광하는 이들은 대부분 남자, 그 중에서도 군필자들이다. 전의경 이야기라는 소재는 독특하지만, 그만큼 매니악했다.
‘노병가’에는 수많은 전의경 예비역들의 리플이 달린다. 그들은 “현역한테는 의경이라고 무시당하고, 시민들한테는 권력의 도구라고 비난당해왔는데 속이 후련하다”라며 ‘노병가’에 열광한다. 종종 “그래봤자 의경”이라는 육군 예비역들의 주장에 “니들이 실전을 겪어봤어?”라며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노병가(老兵歌)란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의경들의 비공식 군가를 말한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의경이 되어, 꽃피고 눈내린지 어언 26개월,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방석복에 실려간 내 군대생활“이라는 가사로 되어있다.
“어느날 시위대와 대치하는 닭장차를 보면서 이걸 꼭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죠. 보편적인 의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난 5일, 서울 아현동에서 ‘노병가’의 작가 ‘기안84(필명)’를 만났다. 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수원대 서양화과 출신의 신인 만화가다.
그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휴학하던 중 미술학원 강사를 거쳐 만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노병가’는 의경 출신 친구의 경험을 살린 만화다.
‘노병가’ 14화에는 2005년의 평택 미군기지 이전 시위현장이 등장한다. “왜 맞고만 있나? 내가 책임진다! 밀어버려!”라는 지휘방송이 화제가 된 바로 그 현장이다.
이 편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리플은 “매스컴에선 미친 경찰이라고 못박았지만, 우리 편이 없었던 우리들에겐 최고의 순간이었다”라는 내용이다.
“멋지잖아요? 그 분은 전의경들의 영웅이에요. 요즘 보면 책임을 현장에 미루려고만 하니까 답답하죠. 전의경은 진압하는 훈련을 받았고, 명령대로 했을 뿐입니다. 책임은 위에서 져야죠.”
‘노병가’에는 매일 사소한 트집으로 후임들을 때리는 고참이 있다. 지옥 같은 훈련에 괴로움의 한숨을 토하다가도 옆 부대와의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청춘이 있다.
연인의 배신에 눈물을 삼키는 젊음이 있다. 전의경 부대와의 충돌과정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 시위자가 있다. 방패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갈라진 죽봉 끝에 전율하는 주인공이 있다.
추격이 시작되자 분노의 화신으로 돌변, 방패와 발길질로 시위대를 구타하는 전의경도 있다. ‘노병가’는 솔직한 이야기, 인간적인 이야기다.
“사실 진압이 시작되면 때리는 걸 즐기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시위대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씻지도 못하다보니 사람이 그렇게 되죠. 그들에겐 시위가 왜 벌어졌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노병가’에서 부대 내 구타는 일상이요, 기합은 생활이다. 작가는 “지금은 구타나 가혹행위가 많이 없어졌다”면서도 “요즘도 때리는 곳이 있을 수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많이 맞다보면 어느새 ‘예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이 ‘예씀다!’로 들릴 정도로 빠르게 대답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가 유명세를 실감할 때는 전의경 구타 사건이 뉴스에 보도될 때다. 갑자기 ‘노병가’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광주 모 경찰서에서 벌어졌던 구타 영상은 ‘노병가 극장판“이라는 이름으로 웹상에 떠돌기도 했다. 그는 “사실 작가로서 사건이여 더 터져라 싶은 나쁜 마음이 들 때도 있다”며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고 덧붙였다.
“저는 눈 크고 쭉쭉빵빵하고 일본식 교복 입은 여학생들 나오는 만화는 별로 안 좋아해요. 긍정적인 표현보다는 사실적인 표현이 좋아요. 치우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죠.”
‘기안84’는 유명 커뮤니티 ‘디씨인사이드’의 ‘카툰 연재 갤러리’를 통해 데뷔했다. 작가는 수많은 리플이 달리면서 더 용기를 얻었고, 이후 매니지먼트도 생기고 포털로도 진출하게 됐다.
그는 “아직 단행본 출판은 생각 안해봤는데, 출판되면 의경 부대마다 일괄 배치되고 중대장님들도 좀 보시고 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때문에 작가는 ‘노병가’를 40화 정도에서 마무리할 생각이다. 차기작은 좀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처녀작인 ‘노병가’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그는 친구와 함께 ‘노병가’를 영화로 만드는 것을 꿈꾸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나 경찰 측의 지원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사실적인 군대 영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