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철 남자배구대표팀 감독은 "배구를 하면서 어려웠던 적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사실 맨 윗길만 걸어왔다. 하고 싶은 건 다하고 살았다. 고교 졸업 때까지 전승가도를 달렸고, 12년간 국가대표로 뛰면서 '컴퓨터 세터'로 명성을 날렸다. 이탈리아 리그에 진출해서도 역사로 남은 숱한 기록들을 작성했다. 재주가 워낙 출중하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그래선지 대형사고도 많이 쳤다. 그의 배구인생은 그야말로 화끈했다. |
아버지 배신(?)하며 배구의 길로… 태릉선수촌 '홀로 탈출'대형사고 |
81년 伊 파르마 입단 … 의사소통 안돼 그림 그려가며 경기 4000여 홈팬 앞에서 사사건건 시비거는 동료 엉덩이 걷어차 87년 2부리그 입단 우승 … 감독 맡아 1부리그 정상 '신화' |
▶아버지를 배신하다
애당초 육상선수였다. 시골 학교(밀양 밀주초등) 선수였지만 6학년 때 전국대회 1500m에서 우승까지 했다.
하지만, 혼자 하는 운동은 재미가 없었다. 당연히 즐겁게 공놀이하는 배구에 눈이 갈 수밖에.
그러던 차에 학교에서 1년 유급을 시켰다. 과거엔 더러 있던 일이다. 좀 더 묶어 두면 더 많은 메달을 따오는 건 당연한 일. 그래서 6학년을 두 번 다녔다.
덕분에 배구를 겸하게 됐고, 배구선수로 밀양중에 진학했다. 낭중지추라. 배구에서도 돋보이자 2학년 때 서울 대신중에서 데려갔다.
아버지의 실망이 이어졌다. 육상을 무척 좋아해 늘 잠든 아들 머리맡에 운동복을 준비해 두시던 아버지. 아침 6시면 어김없이 깨워 운동 내보내는 게 큰 즐거움이셨던 아버지의 눈에 배구하는 아들이 달갑게 보일 리 만무했다.
"대신고 2학년 때까지 아버지는 경기장에 안 오셨어요. 주위에서 하도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부산대회 때 몰래 관중석에 앉았다 가셨던가 봐요. 나중에 알았습니다."
정말 잘했다. 공격수로 뛰다가 키가 안 커 세터로 변신했고, 고교 졸업 때까지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물론 벤치에 앉은 적도 없고.
"학교 지원이 거의 없었어요. 손가락에 감을 반창고가 없어 늘 재활용해서 썼습니다. 한 번 쓰고 밥풀을 먹여 벽에 붙여놨다가 다시 감았죠."
▶선수촌을 탈출한 막내
1975년 한양대 1학년 때 대표선수로 발탁됐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겨냥한 대표팀이었다.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했다. 한데 꿈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대표선수라고 뽑아는 놓고 연습도 안 시키고 볼보이에다 '파이팅, 파이팅' 소리만 지르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연습 끝나고 소리 작다고 두들겨 패더라고요. 그때는 군기가 엄청나게 셌으니까요. 두 달 정도 견뎠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 탈출을 감행했다. 국가대표가 모여 있는 태릉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벤치에 앉아본 적 없는 최고의 선수가 소리나 지르고 있으려니 어지간히 애간장이 끓었던 게다.
"사복을 몰래 챙겨 훈련장에 갔죠. 볼보이 하다가 쉬는 시간에 슬그머니 선수촌을 빠져나와 사복으로 갈아입고는 밀양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태릉선수촌이 발칵 뒤집혔고, 한양대도 홀랑 뒤집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대표선수 자격박탈 어쩌고 했을 텐데 막내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기가 막혀 다들 쉬쉬했다.
마침 일본 와세다대 배구팀이 연습경기차 한양대에 와 있었다. 그래서 선수촌에는 소속팀에 경기하러 갔다고 얼버무리고, 한양대에선 선수 찾느라 부산을 떨었다.
"고향집에 가서 일주일 내내 낚시했어요. 집에는 휴가받았다고 거짓말하고요. 연습도 안 시켜 주는데 태릉에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사실 뛰어야 벼룩이었다. 한양대 감독이 밀양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일주일 만에 선수촌에 복귀했다.
"선배들이 웃더라고요. '너 같은 놈 처음 봤다'면서. '세상에 그런 놈이 어딨느냐'면서요. 그때부터 덜 패고 연습도 시켜주더라고요."
놀자는 것도 아니고 운동 좀 열심히 해보자는 뜻에서 저지른 일이라 용서가 된 것이다. 그 두둑한 배짱과 당돌함은 두고두고 선수들 입에 오르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티켓을 땄으나 뜻밖의 결정이 내려졌다. 본선에는 경험 많은 고참들을 내보낸다는. 예상대로 박살났다.
이후 대표팀은 대폭 물갈이됐고,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위에 올랐다. 전무후무한 성적이다. 그 중심에 김호철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탈리아도 놀란 배짱
1981년 세계 최고 권위의 이탈리아 1부리그 파르마에 입단했다. 우승 기록이 없는 팀으로 당시 14개 팀 중 8위에 걸쳐 있었다.
배구는 세터가 사인을 내고 경기를 끌어가니 의사소통은 기본. 한데 난데없는 이탈리어라.... 고민하다가 손가락 사인을 하나하나 그려 복사해 나눠 줬다. 그럭저럭 통했다. 그러다 2개월 만에 홈 경기 도중 사고가 터졌다. 센터를 보는 한 살 아래 팀 동료 람프란코와의 충돌이었다. 이탈리아 대표팀 센터로, 잘 생기고 인기도 가장 많았지만, 성격이 괴팍하고 곧잘 잘난 체하며 건방을 떠는 친구였다.
번번이 자기가 실수해 놓고도 공이 높네 낮네 해가며 성질 급한 김호철의 심장에 불을 지폈다.
한 번은 상대의 블로킹도 없는 상태에서 때린 공이 아웃되고 말았다. 독이 올라 있던 김호철이 '이번엔 무슨 변명을 댈 거냐'는 뜻으로 "왜?" 하며 쳐다보자 람프란코가 대뜸 "볼이 낮잖아"하고 또 투덜거렸다.
순간 속에서 불덩이가 치민 김호철이 "이 새끼가~"하고 외치며 냅다 엉덩이를 걷어차 버렸다. 그것도 4000명의 홈팬들 앞에서.
팀에서 가장 작은 1m75짜리 세터가 경기 도중 2m 장대를 조져놨으니 관중도 놀라고, 감독도 놀라고, 동료도 놀라고, 심판도 놀랄 뿐이었다.
여차여차하여 경기는 이겼다. 김호철은 샤워도 안 한 채 탈의실에서 가방을 챙겨 나오며 코치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 너희랑 배구 안 해." 그 길로 집으로 가버렸다.
리그 중에 일어난 사태라 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한밤중에 회장과 코칭스태프가 한국인 통역을 급히 구해 찾아왔다. "여기는 한국과 다르다. 제발 맞춰서 해 달라"며 설득하고 애원했다.
바로 주저앉기엔 머쓱한 상황. 마침 김호철에게 볼을 많이 못 받아 앙심을 품고 있던 일부 동료가 들고일어난 상태였다. 그 중 유독 악을 쓴 녀석을 지목하며 제안을 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그 친구는 곧바로 다른 팀으로 쫓겨갔고, 복귀한 김호철은 팀에 사상 첫 우승과 2연패라는 선물을 거푸 안겼다.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보너스였다.
이탈리아 언론들이 '황금손', '마술사' 등의 애칭을 붙여줬다.
1987년에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베네통이 후원하는 2부리그 트레비소에 입단, 단박에 우승시켜 1부리그에 올려놨다. 1995년부터는 이 팀 감독을 맡았고, 1998년 1부리그 우승까지 일궈냈다.
"지금도 휴가 때 이탈리아 가면 베네통 회장과 함께 골프를 합니다. 저를 참 좋아하거든요."
▶이탈리아에 안 갔으면...
이탈리아 생활은 김호철 배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새로운 것에 눈도 떴고요. 주먹구구에서 데이터 배구를 배우고, 외국인 선수 가르치는 방법도 터득했습니다. 한국에서 배구를 어떻게 하느냐를 배웠다면, 이탈리아에선 배구를 어떻게 운용하느냐를 배웠습니다. 오늘의 나는 이탈리아 생활이 만든 거나 다름없지요."
만약 이탈리아에 안 갔더라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탈리아 안 갔으면요? 그래도 지도자 생활은 했겠죠. 그냥 다른 지도자들처럼 팀 맡아 경기하고.... 그러다가 성질 못 이겨 선수 두들겨패고 잘렸거나, 물건 때려부수고 옷 벗었겠죠. 허허허."
화끈한 성격, 화끈한 말투. 그게 명감독 김호철의 매력이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