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가문의 두 여인이 최근 '바그너의 성지(聖地)'인 바이로이트 축제를 책임지는 공동감독으로 나란히 취임했습니다. 서른 살 터울이 넘는 이복자매인 에바 바그너 파스키에(Eva Wagner-Pasquier·64)와 카타리나 바그너(Katharina Wagner·30)가 주인공입니다. 이들 자매는 1951년부터 반세기 이상 축제를 이끌면서 이 음악제를 부흥시킨 볼프강 바그너(Wolfgang Wagner·90)의 두 딸입니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의 증손녀가 됩니다.
언니 에바는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의 예술고문을 지낸 음악행정가이며, 동생 카타리나는 신진 오페라 연출가입니다. 바그너의 오페라만을 전문적으로 상연하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이처럼 4대째 바그너 가문이 꾸려나가는 '가족 경영 체제'입니다. 작곡가 바그너 자신이 1876년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을 초연하면서 축제와 극장의 역사도 더불어 시작됐습니다.
우의 좋게 자매가 축제를 함께 이끄는 듯 보이지만, 그간 물밑에서는 가족 내 권력 암투가 치열했습니다. 당초 2001년 딸 에바가 아버지 볼프강을 이을 후계자로 바그너 재단 투표에서 지명됐지만, 아버지가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난항이 시작됐습니다.
두 번째 부인과 사이에서 난 늦둥이 딸 카타리나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급부상한 것도 이즈음입니다. 2007년 당시 28세의 카타리나는 축제에서 증조할아버지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직접 연출했지만, 평단과 팬들의 야유와 혹평이 뒤따르면서 융단폭격을 맞았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처럼 상황이 돌아가자, 고독한 노(老)군주 볼프강은 급기야 두 딸의 공동운영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기에 이릅니다.
돌아보면 바그너 가문의 역사는 대대로 여인천하였습니다. 1883년 바그너가 타계한 뒤 축제의 안방 살림을 맡은 책임자는 아내이자 작곡가 리스트(Liszt)의 딸인 코지마(Cosima)입니다. 코지마는 1886년부터 바그너의 음악극을 무대에 올리면서 바이로이트를 정성껏 '바그너의 순례지'로 가꿨습니다.
코지마는 1907년 지휘자인 아들 지크프리트(Siegfried)에게 축제의 바통을 넘겼는데, 1930년 코지마와 아들이 나란히 세상을 떠나자 며느리 비니프레트(Winifred)에게 전권이 돌아갑니다. 영국 출신의 비니프레트가 바그너의 광적인 팬이었던 히틀러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바이로이트는 나치의 본거지가 되고 맙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활동을 금지당한 비니프레트는 두 아들인 빌란트와 볼프강에게 축제를 넘겼습니다. 이들은 연출가이자 행정가로 축제를 함께 꾸리면서 축제를 되살려냈지요. 두 딸은 과연 아버지 형제가 보여줬던 우의를 본받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