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獻貞)왕후 황보씨는 고려의 제5대 임금 경종(景宗·955~981)의 비로 천추태후로 더 유명한 헌애(獻哀)왕후 황보씨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헌애왕후도 경종비였다.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모두 황보씨라고 하지만 실은 왕(王)씨다. 두 사람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왕건과 제4왕후인 신정(神靜)왕태후 황보씨 사이에서 난 왕욱(王旭· ~969)이다. 왕욱의 누이는 제4대 광종의 비인 대목(大穆)왕후다.
왕욱은 훗날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대종(戴宗)으로 추대된다. 고려의 첫 번째 추존왕(追尊王)이었던 셈이다. 왕욱은 이복누이 류씨(훗날 선의태후로 추존)와 결혼해 제6대 임금 성종(成宗·960~997)을 비롯한 세 아들과 헌애·헌정왕후 두 딸을 낳았다.
헌애·헌정 두 자매가 함께 모셨던 경종이 981년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인생경로를 겪게 된다. 경종이 죽자 두 사람의 오빠인 성종이 왕위를 이었고 헌애는 훗날 천추태후로 이름을 날릴 만큼 권력을 휘두르다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반면 경종 사후 대궐을 나온 헌정은 왕륜사 근처 자기 집에서 과부의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유명한 헌정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꿈에 자신이 곡령에 올라 소변을 두었는데 그 소변이 흘러서 온 나라에 넘쳤고 그것이 변하여 은(銀)바다를 이루었다. 이를 학계에서는 선류몽(旋流夢)이라 한다. 이런 선류몽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김유신의 누이인 보희가 서악(西岳)에 올라가 소변을 보았는데 그것이 장안을 잠기게 했다. 그런데 그 꿈이 상서롭다는 것을 알아차린 동생 문희가 비단을 주고 언니의 꿈을 샀다. 그 후 문희는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김춘추와 인연을 맺게 된다.
선류몽은 이처럼 왕위계승, 그것도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을 정당화하는 근거의 하나로 제시되곤 했다. 헌정의 '소변'꿈도 예외는 아니다. 꿈이 기이하다고 여긴 헌정은 점쟁이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지게 되리라"고 말한다. 경종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던 데다가 혼자 살고 있는 헌정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의 집 주변에는 태조 왕건과 신성왕태후 김씨 사이에서 난 왕욱(王郁)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 왕욱(王旭)의 이복동생이다. 삼촌과 조카 사이였던 두 사람은 자주 왕래를 했고 마침내 관계를 가져 헌정은 임신을 하게 되었다. 성종11년(992) 무렵의 일이다.
아무리 고려 초라고 하지만 왕비를 지낸 여인의 스캔들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경상도 사천으로 왕욱을 귀양보냈고 그동안 왕욱 집에 머물던 헌정은 "부끄러워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태아가 움직였다. 헌정은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사내아이를 낳지만 헌정은 세상을 떠난다.
한편 언니 헌애도 외척인 김치양과 애정행각을 벌이다가 김치양은 성종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된다. 997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종과 헌애 사이에 난 목종(穆宗·980~1009)이 제7대 임금에 오른다. 이때부터 천추태후의 세상이었다. 아들이 18살임에도 불구하고 섭정을 하며 김치양도 불러들여 1003년(목종 6)에는 아들까지 낳게 된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 아들로 하여금 후사가 없던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계략을 꾸민다. 그것은 왕씨 왕조가 김씨 왕조로 바뀌는 중대사안이었다.
천추태후가 볼 때 자신들의 구상을 방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조카, 즉 동생과 왕욱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태어났던 그 아이였다. 이미 나이도 10대 중반을 넘고 있었다. 권력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쥐고 있었지만 대의명분은 그 아이에게 있었다.
비정상적인 출생이긴 하지만 아버지 왕욱은 분명 태조 왕건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아이 왕순(王詢)은 성종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극진한 보호를 받았지만 천추태후 천하가 열리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왕순의 머리를 깎아 강제로 출가시켰던 천추태후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살해하려 하였다.
선류몽 덕이었는지 왕순은 그때마다 어렵사리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1009년(목종 12) 중앙조정에 일대 변란이 일어나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패하고 강조(康兆)세력이 승리해 삼각산 신혈사라는 절에 숨어지내던 왕순을 맞아들여 왕위에 앉힌다. 그가 바로 제8대 임금 현종(顯宗 992~1031)이다. 이로써 헌애·헌정 자매의 싸움에서 헌정이 최후의 승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