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열기는 저리 가라죠."



한국시리즈 전날인 15일 광주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가 야구 이야기부터 꺼냈다. "내일(1차전)은 장사 포기했습니다. 어차피 손님도 없을 것인데 나도 집에서 야구 볼라구요. KIA가 너무 오래 쉬어서 그게 문제인데 1,2차전만 잘 넘기면 승산이 있는데 말이죠." 전문가스런 코멘트다. 12년만에 한국시리즈가 열린 광주는 지금 야구에 푹 빠졌다. 하지만 40년이 넘은 열악한 광주구장이 잔치 마당이 되긴 턱없이 부족했다.



메이저리그급 관중 열기에 '사회인야구급' 구장 시설이 우울한 대조를 이룬 날이었다.










빛고을 열기는'ML급'…인프라는'최악'
수용인원 1만3400명…새벽부터 줄서 '명당잡기'

여성팬 "화장실 부족 아예 물도 마시지 않는다"

외야 관중석 "…이왕이면 돔구장" 플래카드도
 

 ▶입장권 전쟁

일찌감치 입장권 구입 대란은 예고됐다. 광주구장의 수용 인원은 불과 1만3400명. 선수들과 관계자의 가족만으도 다 차겠다는 농담이 실없이 들리지만은 않았다. 인터넷 구입에 실패한 팬들은 현장 판매분(1300장)을 손에 넣기 위해 차가운 가을 밤바람도 마다하지 않았다.

1차전이 열린 16일 광주구장엔 전날 밤부터 표를 사기 위해 수십명이 몰려들었다. 종합운동장 관리사무소가 저녁 9시 이후엔 운동장 전체를 폐쇄하기 때문에 이들은 운동장 밖 인도에 널빤지를 깔고 노숙을 했다. 경기 당일 새벽 5시. 종합운동장 문이 열리자 이들은 야구장 앞 매표소에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오전 7시엔 이미 150여명이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오후 3시에 시작한 현장 판매는 불과 20분만에 동나고 말았다. 간발의 차로 표를 못산 관중들은 얼굴을 붉히며 매표소 유리를 두드리며 강하게 항의했다. 뒤로는 수천명이 아쉬움의 탄식을 쏟아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앞쪽에 있던 일부 관중들은 경찰들이 매표소쪽에 몰려 있다는 점을 이용해 다소 경비가 허술한 3루측 입구쪽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표 없이 야구장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경찰 병력이 긴급 출동해 진입을 시도하는 팬들을 끌어냈다. 한 남성팬은 간이로 설치한 기념품숍 지붕으로 올라가 곧바로 2층 진입을 시도했지만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는 한바탕 해프닝이었지만 한편으론 그런 진입을 시도할 정도로 허술한 광주구장 시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씁쓸한 장면이었다.

 ▶물도 안마셔요

오후 3시부터 입장이 허용되자 불과 한시간만에 지정석이 아닌 내야 관중석은 꽉 들어찼다.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1루 응원 단상 바로 앞. 조선대 선박 해양공학과 야구 동아리 회원 10명이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전 9시에 야구장에 도착, 줄을 섰단다. 이들 중 한명인 손 용씨(23)는 "다음주부터 중간고사인데 한국시리즈를 포기할 수 없어 왔다"며 "시즌중에도 일주일에 두번 정도는 야구장을 찾는다. 관중들 수준은 향상됐는데 열악한 야구장 때문에 불편하고 부끄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그는 "앞뒤 의자 폭이 좁아 뒷사람 입김이 느껴질 정도다. 움직이다가 부딪혀 싸움이 날 때도 많다"고 덧붙였다.

함께 온 여성팬인 양선희씨(21)는 여성팬들에게 최악의 시설이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양씨는 "여자 화장실 부족한 건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나를 비롯해 많은 여성 관중들이 야구장에 오면 아예 물도 마시지 않는다. 화장실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참고 만다"고 말했다. 양씨는 올스타전때 서울서 온 친구를 데려 왔는데 너무 창피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낯뜨거운 용비어천가

경기 시작전 KIA 선수들 사이에 황당한 플래카드가 화제였다. 외야 뒷쪽 펜스에 '명문 기아 타이거즈의 새역사는 돔구장에서! 시장님 감사합니다', '꿈 같은 돔구장 건설! 시장님 감사합니다!', '문화수도 광주에 돔구장 유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Thank You! 돔구장 건설! 짱님 감사합니다' 등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지난 7월 광주에 신축구장을 짓겠다고 약속했던 박광태 광주시장이 최근 돔구장을 건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데 따른 찬사다. 광주시 체육회 소속 단체들의 이름으로 작성된 플래카드였다. 이미 박 시장이 지목한 돔구장 건설사들은 하나같이 이같은 사실을 부인했다. 현재까지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내년 지방 선거를 앞둔 박 시장의 '타이밍 좋은' 공약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이날 광주구장을 찾은 박 시장이 양팀 감독에게 꽃다발을 전해주자 관중석에서는 "야구장"을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외야 관중석엔 '돔도 좋소, 일반도 좋소, 이왕이면 돔구장'이라는 관중들이 직접 제작한 플래카드도 내걸렸다.

< 광주=신창범 기자 tigge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