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방송됐던 MBC 드라마 '아줌마'의 한 장면

대중매체는 유행어를 만든다. 2000년, 우리들 삶을 대변해주었던 유행어중 ‘장진구하다’가 있다. ‘인간이 영 못쓰게 되다’ 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명사형인 ‘장진구’는 ‘망가져도 너무 망가진 인물’, ‘인간의 탈을 쓴 두더지 같은 놈’, ‘그만큼 머리 나쁜 놈’이란 뜻이었다. 이 말들은 ‘현실적 욕망을 반성시키는 미학적 표현’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속물적 남편에 반기를 든 아줌마의 홀로서기를 유쾌하게 그린 드라마「아줌마」(MBC)에 등장한 ‘속물적 남편’이 장진구다. 어떻게 박사는 되었지만, 도통 연구보다 줄 잘 서서 편히 놀고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지에만 골몰하는 그가「그대 웃어요」(SBS)의 서정길 얼굴위로 오버랩 된다.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된 것일까. 모두 강석우가 연기하고 있다.

서정길은 장진구와 흡사한 면이 많다. 구속받기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기질, 통이 작아 큰 일 저지르지 못하는 성격,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함과 우유부단함. 작심삼일의 유효기간도 그에겐 너무 짧다. 그뿐인가. 툭하면 찔찔 짠다. 그것도 궁상맞게.

「아줌마」가 방송되었던 2000년은 IMF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천년의 역사를 우리가 만들겠다며 희망의 깃발을 높이 올렸던 때이다. 지난 세기와는 다른 각오, 다른 틀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겠다는 결심이 굳건했던 시기. 그때 이 드라마는 인간 본성에 대해 질문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헛된 욕망이 냉정한 현실을 외면할까봐 걱정되었나보다.

SBS 드라마 '그대 웃어요'

우리 앞에 놓인 진실의 궤적을 따라가자니 일상의 유혹을 벗어날 자신이 없고, 노력하여 정당한 대가를 얻자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시작도 하기 전에 도망가고 싶어진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 얄팍한 구질함을 해결하기 위해 우린 끊임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즉물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니까.

「그대 웃어요」에 등장하는 서정길은 10년 전 우리가 만났던 장진구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서정길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길을 찾아가는 ‘인간 재생 드라마’. 그것이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어쩜 우리들의 모습이 그렇게 서정길스럽기 때문은 아닐까.

일하기 싫은 허풍쟁이, 실력으로 승부하기 보다는 운(運)에 목숨 거는 한심장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독불장군, 남의 아픔은 느끼지 못하는 냉혈한 같은 사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이제 ‘서정길스럽다’라고 불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