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날씨와 여자는 믿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 화창하다가도 폭우가 쏟아지고 "사랑한다"며 한국 남자에게 접근해오는 여자들 대부분이 돈을 노린 경우가 많다. 필리핀에서는 한류 열풍이 거세다.
연예인들이 한인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다듬고 젊은이들은 그룹 '원더걸스'를 초청해달라고 서명운동을 벌일 정도다. 올 8월에는 원더걸스의 '노바디'를 듣고도 무슨 노래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길가는 시민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어딜 가나 영어가 통하고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필리피노'들이 있다는 점은 필리핀의 매력이다. 국민의 80%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의 크리스마스는 9월부터 시작된다. 12월이 가까워질수록 도시 전체가 트리 장식으로 반짝인다. 서늘한 여름 바람 아래 캐럴을 들으며 '산 미구엘'맥주를 마시는 것은 또다른 재미다.
◆스페인의 식민 지배의 흔적
수도 마닐라는 관광도시가 아니다. 남쪽 휴양지인 보라카이나 팔라완 섬을 가기 위해 거쳐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400년 넘게 필리핀의 수도였던 마닐라는 마닐라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필리핀의 모습들이 많다.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을 나온 외국인들이 맨 먼저 들르는 곳이 리살공원이다. 호세리살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친 것 같은 영웅이다. 외과의였던 그는 19세기 후반 스페인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리살의 추모탑은 자동차 번호판의 배경으로 쓰이고 그의 얼굴은 1페소짜리 동전에도 있다. 국민 70%가 극빈층인 특성상 평생 가장 큰 화폐인 1000페소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아 가장 작은 화폐에 영웅을 넣었다.
그 다음 필수 코스가 '인트라무로스'다. 성벽 안이라는 뜻으로 스페인 통치 시절 원주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도시 전체를 3.7㎞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쌌다. 이곳에는 스페인풍 거리와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중 마닐라 대성당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성 어거스틴 성당이 볼거리다. 16세기 지어진 두 성당에서 결혼하는 것이 필리핀 상류층의 꿈이다. 500만원 이상의 성금을 내야 하지만 1년 예약이 꽉 차있을 정도다.
◆대중교통 수단의 향연
마닐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갖가지 탈 것들이다. 벤츠와 인력 자전거가 같은 도로를 달릴 정도로 빈부 차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다양한 교통수단들이 생활수준에 맞춰 세분화돼 있다.
'트라이시클'이라 불리는 삼륜차가 오토바이용과 자전거용으로 나누어져 있고 버스 역시 창문이 있는 일반 버스와 창문이 없이 개방된 '누드 버스'가 있다. 물론 창문이 있는 버스에서만 냉방이 가능하다.
필리핀 택시기사들의 악명은 자자하다. 합승이 가능하고 정해진 노선만을 달리는 승합차 택시도 따로 있다. 택시는 필리핀의 가장 비싼 교통수단으로 기본요금은 30페소(약 740원) 정도다.
대중교통의 꽃은 '지프니'다. 미국 식민지 시절 미군 지프트럭을 개조한 것으로 차 뒤에 매달려 타면 20명까지 탈 수 있다. 기본요금은 7페소(약 170원) 정도로 필리핀 구석구석에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다.
지프니 역시 창문이 없어 매연 가득한 출근길의 아가씨와 학생들에겐 손수건이 필수다. 정해진 노선을 왕복하는 지프니는 서있을 때면 어디서라도 올라탈 수 있고 천장을 두드리기만 하면 어디서든 내릴 수 있다.
버스, 택시, 지프니 할 것 없이 마닐라의 모든 탈것 뒤에는 고객 만족도를 체크하는 문구(How's my driving?)가 있지만 그 밑에 적힌 전화번호는 이상하게도 대부분 동일하다. 물론 통화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싸봉', 권투, 농구
마닐라의 한 교민은 "22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사는데 새벽마다 옆집 닭이 울어 잠을 설친다"고 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애완용으로 닭을 키울 만큼 곳곳에서 닭을 볼 수 있다. 윤기가 흐르는 수탉들은 대부분 싸움닭이다.
'싸봉(ssabong)'이라고 불리는 전통 닭싸움은 우리 소싸움과 같은 필리핀의 대표 스포츠다. "싸봉을 모르고 필리핀을 논하지 말라"고 한다. 필리핀 전역에 1만여개 닭싸움 경기장이 있고 주말마다 생중계를 해줄 정도다.
또 하나의 국민 스포츠가 바로 권투다. "대통령 선거에 나오면 당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필리핀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31)의 인기는 높다. 파퀴아오는 15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웰터급 타이틀 매치에서 승리했다.
프로 복싱 6개 체급(플라이급~웰터급) 석권에 성공한 그의 경기는 거리 술집과 방송은 물론 극장에서도 생중계를 했다. 그는 필리핀의 자존심이다. 공식 행사에서도 대통령 아로요의 옆자리는 그의 몫일 정도라고 한다.
미국의 영향으로 농구도 인기다. 시골에 가도 농구 골대가 있고 농구공을 튀기는 아이들이 있다. 한 교민은 "한국에서 농구를 잘하는 학생이 전학을 오면 그 학교 '짱'이 된다"고 농구의 인기를 설명했다.
우는 아이들도 "'졸리비(Jollibee)' 가자"고 하면 울음을 그친다. 맥도날드의 아성을 무너뜨린 필리핀 외식업체 졸리비다. 햄버거와 치킨은 물론 밥과 국수까지 다양한 메뉴가 있다.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꿀벌 모양의 졸리비 캐릭터는 아이들의 우상이다. 냉방이 잘 돼 있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저녁은 졸리비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족 모습을 그릴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가격은 만만치 않다. '깐띤'이라고 하는 거리 식당에서 밥과 반찬 한끼에 30페소(약 740원)로 해결하는 대부분 필리핀 국민들에 비하면 100페소(약 2500원)가 넘어가는 졸리비 메뉴는 부담이다.
180페소(약 4500원)까지 하는 스타벅스 커피 역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스타벅스 손님들은 인터넷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들고 있는 외국인들이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