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21대 국왕 희종(熙宗·1181~1237)은 1204년 아버지 신종(神宗)이 당시의 실권자 최충헌에 의해 쫓겨나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즉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가운데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때 희종의 나이 한창때인 스물네 살이었다. 최충헌이 이의민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명종 26)이니 최씨 정권도 10년쯤 돼가고 있었다.
희종은 유순했던 아버지와 달리 왕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다. 그것은 곧 언젠가는 최충헌과 정면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회를 노리던 희종은 마침내 재위 7년째를 맞은 1211년 12월 어느 날 내시낭중(內侍郎中) 왕준명(王濬明)을 중심으로 한 친위쿠데타를 결행에 옮긴다. 참정 우승경, 추밀 사홍적, 장군 왕익 등 소수의 문무관리들도 이 계획에 동참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최충헌이 형식적이나마 인사문제에 관한 보고를 하러 수창궁(壽昌宮)에 들어오는 것이 거사의 신호탄이었다. 최충헌이 희종에게 보고를 마치자 희종은 곧 내전(內殿)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환관이 최충헌의 종에게 이르기를 "임금께서 술과 음식을 하사토록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고 거짓말을 한 다음 최충헌을 궁궐 깊숙한 장소로 유인했다. 모든 게 계획한 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대궐 내 은밀한 곳에 숨어 있던 10여명의 무장한 승려와 병사들이 기습을 가했다. 이에 놀란 최충헌은 일단 몸을 피해 희종이 있는 내전으로 나아갔다. "저를 구해 주십시오!" 아무리 외쳐도 희종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애당초 자신이 구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온 최충헌은 다시 한 건물의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겨야 했다. 희종을 돕던 한 승려는 최충헌이 숨어 있는 건물에 3번이나 찾아와 수색을 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여기서 운명이 바뀌고 있었다. 희종과 최충헌의 운명이 갈림으로써 이후 역사도 현재와 같은 방향으로 흘러오게 된다.
최충헌의 집안 사람인 상장군 김약진(金躍珍)은 대궐을 도망쳐 나온 최충헌의 종들로부터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군사들을 이끌고 대궐로 달려와 최충헌을 구해냈다. 거사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최충헌으로부터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들은 김약진은 아예 희종도 제거하겠다고 길길이 뛰었으나 최충헌이 만류했다. 그러나 최충헌으로서도 희종은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애걸했건만 싸늘하게 외면했던 희종이 아니던가?
이미 명종과 신종을 폐위시킨 경험이 있는 최충헌이었다. 다만 명종과 신종을 죽이지 않았던 것처럼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시키면서도 죽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최충헌은 다른 무신들과 달리 절제(節制)의 힘을 아는 인물이었다. 31살의 나이에 왕권을 빼앗긴 불운의 국왕 희종은 강화도를 거쳐 자연도(紫燕島·지금의 영종도)로 유배되었고 태자도 인주(仁州·인천)로 추방됐다.
희종을 내쫓은 최충헌은 희종의 사촌형님이자 명종의 아들인 강종(康宗·1152~1213)을 22대 임금으로 추대한다. 이때 강종의 나이 61세였다. 아마도 명종이 강제 폐위되지 않았더라면 이미 15년 전쯤에 왕위에 올랐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강종은 고령으로 인해 1년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한편 자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전왕(前王) 희종은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했다. 유배 4년째인 1215년(고종 2) 8월 최충헌은 희종의 유배지를 다시 강화도로 바꾼다. 마음이 풀어진 때문인지 배려가 담긴 조처였다. 다시 4년 후인 1219년(고종 6) 3월에는 사람을 보내 희종을 개경으로 맞아들인다. 희종에게는 딸이 5명이 있었다. 그중 덕창궁주를 최충헌은 아들 최전과 결혼시켜 자신의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희종은 기구하게도 최충헌과 사돈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해 9월 최충헌도 세상을 떠난다.
일단 최씨 집안과 인척관계를 맺게 된 희종은 목숨뿐만 아니라 부귀영화를 보장받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1227년(고종 14) 3월 복위(復位)를 도모하고 있다는 모략을 받아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가 희종을 다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희종은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1237년(고종 24) 8월 5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영욕(榮辱)의 삶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