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거 악어 인형 맞지?"

말괄량이 삐삐처럼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초등학교 4학년 꼬마가 초록색·빨간색 봉제인형을 한 팔에 하나씩 안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가 "에이, 하마 같은데?" 했다. 꼬마가 까르르 웃었다. "이게 무슨 하마야? 몸통이 길쭉하잖아. 다리도 네 개야." 아빠도 지지 않았다. "아니야, 하마 맞아. 하마도 다리가 네 개란 말이야."

꼬마는 장난기 감도는 눈동자에 둥근 뺨을 하고 있었다. 분홍색 티셔츠에 검은 바지, 은색 꽃무늬가 반짝거리는 검정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이 평범한 꼬마에게 작년 12월 11일 아침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근처에 살던 조두순(57·청송교도소 수감)이 학교 가는 꼬마를 상가 건물 화장실에 끌고 가서 마구 때리고 성폭행한 것이다.

나영이의 그림도 변했다 나영이는 지난여름 해바라기아동센터에서 그림 심리 치료를 받던 도중“범인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며 조두순이 쥐와 바퀴벌레가 돌 아다니는 감옥에 갇혀 망치로 머리를 맞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왼쪽 그림〉을 그렸다. 지난 7일 기자와 만난 나영이는 인기 만화 캐릭터‘스폰지밥’〈오른쪽 그 림〉을 꽤나 비슷하게 그려냈다.“ 안경을 써야지 더 멋질 것 같다”며 뿔테안경까지 그려 넣었다. 연세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넉 달 만에 그린 그림에서 어떤 심리적 불안이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다”며“정말 많이 회복됐다”고 말했다.

꼬마는 후유증으로 장기 상당 부분을 잘라내 배변 주머니를 달고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의료진은 "어른이 된 뒤에도 여성 기능과 배변 기능에 장애가 남을 수 있다"고 했다. 꼬마의 사연이 '나영이'라는 가명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끓어올랐다.

7일 오후 나영이 부녀가 서울 서초동에서 본지와 단독으로 만났다. 주치의인 연세대 소아정신과 신의진(45) 교수, 치료와 회복을 돕고 있는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 이명숙(46) 변호사도 동석했다.

신 교수가 나영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배변 주머니 떼는 수술을 받기로 마음먹었어?"라고 물었다. 나영이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초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받을 배변 기능 회복 수술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러 시간 걸리는 대수술이지만, 성공하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배변 주머니를 뗄 수 있게 된다. 생글거리는 나영이의 오른쪽 뺨에 '이빨 자국'이 보였다. 조두순의 흔적이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이었지만 나영이와 가족들은 조금씩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건 이후 생업도 그만두고 딸을 돌봐온 나영이 아버지는 "아이가 올 2월까지 악몽을 자주 꿨는데, 신 교수님을 만난 뒤 많이 잦아들었다"며 "요즘은 누가 먼저 묻기 전에는 범인을 원망하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영이는 쑥스러운 얼굴로 신 교수를 흘깃 보더니 "의사요!"라고 싹싹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파 봤기 때문에 아픈 친구들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아프지 않게 치료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을 돕고 싶다는 얘기였다.

이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의 밑바탕에는 피해자 나영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악몽의 무게에 비해 가해자 조두순이 받은 징벌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검찰은 당초 조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범인이 만취한 상태였다"는 이유로 형량을 깎아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검찰도 이에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조두순이 검거 직후 범행을 부인했다는 사실도 분노를 더했다.

형편이 어렵던 나영이네 집에 후원의 손길을 뻗어온 이들이 많았다. 따뜻한햇살 양성평등상담소 등이 모금운동을 벌였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기업인, 평범한 가정주부 등 각계 각층이 정성을 보탰다. 연말까지 총 2억2000만원이 걷힌다. 이 돈을 재원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나영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매달 100만원씩 보태주기로 했다.

나영이 아버지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들어온 성금 외에, 몇몇 분들이 우리 가족을 찾아와 개인적으로 보태주신 돈이 총 300만원쯤 된다"며 "나영이에게 한약도 먹이고, 갖고 싶다는 자잘한 물건도 사주며 요긴하게 썼다"고 했다. 나영이 아버지는 매달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주는 돈을 되도록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가 나영이가 어른이 됐을 때 줄 계획이다.

연세대 의대도 배변 기능 회복 수술을 약속했다. 신 교수는 "이번 주 안에 정밀 검진을 모두 마친 뒤 내년 1~2월에 본격 수술을 받으면 3월 신학기 때는 다른 친구들처럼 자유롭게 학교 화장실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영이가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보도된 뒤, 신 교수에게는 수많은 이메일이 쏟아졌다. 신 교수는 "낯 모르는 시민들로부터 '감사하다' '너무 잘 됐다'고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이메일을 수도 없이 받았다"며 "대부분 '나영이 또래 딸을 키우는 평범한 부모'라고 자신을 소개한 분들이었다"고 했다. "내년 여름방학 때 나영이 가족을 미국에 초청해 디즈니랜드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해온 재미동포 독지가도 있었다.

나영이 아버지는 "작년까지만 해도 천생 초등학생이었던 녀석이 지금은 정신적으로는 대학생이 다 된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매일 일기를 써요. 가끔씩 몰래 읽어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 탓부터 먼저 해요. 어느 날 아이를 꾸짖고 미안한 마음에 일기를 들춰봤어요 '아빠한테 혼났다'는 내용 대신 이렇게 적어놨어요. '내가 아빠 같아도 혼냈을 거야. 분명히 내가 잘못했으니까.' 어린애가 너무 일찍 어른이 돼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나영이는 보름에 한 번 학교를 조퇴한다. 서울 신촌에 있는 해바라기아동센터에 가서 상담 치료를 받고, 병원에도 들른다. 나영이 아버지는 "살림이 빠듯하지만 어떻게든 자동차를 한 대 장만할 계획"이라고 했다. 마흔 넘어 낳은 늦둥이가 배변 주머니를 찬 채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그의 가슴에 두고 두고 못질을 했다.

나영이 부모는 경제적인 이유로 따로 살다 사건 이후 다시 합쳤다. 나영이보다 세 살 위인 큰 딸도 충격을 받았다. 나영이 아버지는 "큰 딸이 동생 일로 부쩍 신경이 예민해져 걱정"이라며 "내년 여름방학 때 심리 치료를 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이명숙 변호사는 "나영이가 생각보다 빨리 충격에서 헤어나고 있는 것 같아 볼 때마다 대견스럽다"며 "성폭행 피해 어린이들이 사회의 정성과 관심에 따라 얼마든지 잘 회복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했다.

사건 직후 범인이 쥐와 해충이 있는 감방에서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그림을 그려 어른들 마음을 아리게 했던 나영이는 이날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만화 캐릭터 '스폰지밥'이 장난스럽게 웃는 장면, 공주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장면 등을 쓱쓱 그렸다.

"스폰지밥이 안경을 쓰면 더 멋질 것 같아서 한번 씌워봤어요. 그리고 이 여자아이는 저예요. 예쁘죠? 헤헤!"

"요즘 뽀로로가 인기라던데, 뽀로로는 안 그려?" 하고 묻자, 나영이는 "에이, 그건 아기들이나 보는 거잖아요" 했다. 나영이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본 신 교수가 "아이의 마음이 아프다는 메시지를 찾을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이 또래 여자아이의 그림"이라고 했다.

어느새 창밖이 캄캄해지자 신 교수가 "맛있는 저녁 먹으러 가자"고 했다. 이 변호사가 나영이 품에 미리 준비해온 선물을 안겨줬다. 노란 바탕에 갈색 점이 촘촘히 박힌 앙증맞은 쌍봉낙타 봉제인형이었다. 나영이가 "우와!" 하고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나영이 아버지는 "남다른 고통을 겪은 딸을 건강한 어른으로 키우는 게 내 꿈"이라고 했다. 그는 "사회적 관심에 감사드리지만, 아쉬운 점도 느낀다"고 했다.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런 일을 당했을 경우 최대한 아이들 입장에서 조사가 이뤄지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회의 관심은 온통 형량을 얼마나 늘리느냐에 쏠린 것 같아요."

"세월이 흐른 뒤 범인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짐승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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