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에게 화려하게만 보이는 패션모델의 세계. 하지만 톱 모델 김다울(20)이 지난달 19일 프랑스 파리 자택에서 자살해 충격을 던졌다. 김다울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었던 것일까. 프랑스 경찰이 사망 원인에 대해 재수사에 착수한 가운데 패션모델들의 세계가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패션모델들에게는 어떤 기쁨과 남모르는 애환이 있으며 또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패션모델이 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 지 등에 대해 조명해봤다. < 편집자주> |
"셔터 소리가 장맛비처럼 쏟아질 때 희열 느끼죠" |
뉴욕-파리-밀라노 등 세계 4대 컬렉션에서 화려한 워킹 치열한 경쟁-외로움 이중고…우울증 걸리면 미칠 것 같아 |
"포토라인에서 카메라 셔터소리가 한여름 장맛비처럼 쏟아지면, 그 소리가 뭐라 말할 수 없이 좋다. 그 소리가 클수록 희열을 느낀다."
패션모델 이현이(26)는 런웨이(무대)에 섰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환한 불빛 속을 여왕처럼 걸어가, 카메라 셔터소리에 온몸을 맡기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라는 것이다. 외국 패션쇼는 국내보다 셔터소리가 20배나 많다. 그래서 더 좋다. "내려오고 싶지 않다. 난 축복받았다"고 말할 정도다. 무대 체질이다.
이현이는 국내 패션모델 중 최고 스타다. 2005년 SBS슈퍼모델 '컬러플 대구' 상을 수상하면서 모델 활동을 시작한 후, 5년 동안 국내외 유명 패션쇼에 다 서봤다. 특히 뉴욕, 파리, 밀라노 등 세계 4대 컬렉션에서 샤넬, 안나 수이 같은 최고 디자이너의 패션쇼에 30회 이상 올랐다. 지난 10월 초까지 밀라노서 활동하다가 귀국, 서울컬렉션에 참가했다.
이현이는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을 패션모델의 최고 매력으로 꼽았다. 지금까지 지구촌 20개 도시 가량 가봤다. 2007년 해외에 진출한 후, 1년의 절반은 외국에서 생활한다.
패션모델의 세계는 화려해 보인다. 모델은 가장 멋진 옷, 시대를 앞서 가는 최첨단 유행의 옷을 가장 먼저 입는다. 신기한 게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입을 수 없는 '초현실적인' 옷이 사진으로는 더 예쁘게 나온다"는 점이다.
그러나 애환도 많다. 특히 해외 패션쇼 무대는 고난의 연속이다. 해외 에이전시에 프로필(사진)을 보내 그쪽에서 OK하면 일이 시작된다. 이후 비행기 예약, 숙소, 식사, 오디션, 촬영, 쇼 등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 생활비도 자비로 충당한다. 한국에서 번 돈을 외국에서 쓰고 온다.
가장 힘든 것은 오디션이다. 디자이너 사무실을 무작정 찾아가는 방법 밖에 없다. 한 곳에서 2, 3시간 기다리기 일쑤다. 절차는 아주 간단하다. 프로필을 주면, 캐스팅 담당자가 모델을 아래 위로 쓱 훑어본다. '생큐'라는 말이 나오면, 그걸로 끝이다. 군말없이 뒤돌아서 나와야 한다. '워킹 한번 보자'고 하면 1차 합격. '옷 입어 볼래?'를 지나 '사진 찍자'까지 가면 합격이다. 이현이는 "오전 9시부터 하루 15곳 정도 돌다보면 완전히 녹초가 된다. 세계 4대 컬렉션 시즌에는 한 도시에서 보통 50곳 정도, 1년이면 총 200곳이나 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다행히 이목구비가 예뻐 성공률이 높은 편이다.
외국 생활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뉴욕, 파리 같은 패션도시에는 '모델 아파트'가 따로 있다. 방 4개짜리 50평 크기가 일반적인데, 각 방에는 2, 3개의 침대가 있다. 2주일 정도 전세계 모델들과 공동 생활을 한다. 밥은 각자 해먹는다. 청소를 안해 '돼지우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에피소드도 많다. 러시아에서 온 띠동갑 모델과 같이 생활한 적도 있다. 영어를 못해 'How are you'를 'Who are you'라고 말하던 모델도 봤다.
한해 50회 정도 무대에…내년초 MC 도전 |
치열한 경쟁과 삭막한 생활에 시달리다 보면, 외로움을 타지 않을 수 없다. 이현이는 "나도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그냥 견딘다"고 털어놨다. 이현이는 "미칠 것 같다"는 표현도 했다. 요즘에는 경쟁이 더 심해졌다. 중국 모델들의 인해전술 때문이다. "서양인들 눈에는 한국, 중국, 일본 모델의 차이가 없다. 그냥 동양인이다. 그런데 중국은 시장이 커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인종차별보다 더 무서운 현상이다. 지난 달 파리에서 자살한 고 김다울은 이름,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국내 한 패션잡지가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모델' 특집을 할 때 만났고, 이후에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이현이는 "강한 이미지였는데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무렵에 지인들로부터 수많은 안부 전화를 받았다.
지금이야 톱모델이지만, 사실 패션에는 관심이 없었다. 모델이 되기 전에는 패션잡지를 본 적이 없다. 모델이 된 것은, 진로 고민의 결과였다. 이화여대 경제학과 3학년 재학 중 금융계에 진출한 선배들 얘기를 듣고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다. 연극반 활동하면서 경험했던 무대가 좋았고, 그래서 모델 선발대회에 참가했다. 물론 부모님께는 알리지 않았다.
요즘에는 1년에 50회 정도 무대에 선다. 한달에 26일, 하루 2~3회 일한 적도 있다. 또래에 비해 연봉은 많은 편이다. 데뷔 초에는 회당 50만원 받았고, 현재는 200만~300만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신인 때는 일이 많고, 요즘엔 일이 적어서 전체 수입은 비슷하다. 외국 무대는 디자이너에 따라 다르다. 프랑스 신인 디자이너 쇼에서는 300유로(약 50만원), 샤넬 쇼에서는 3300유로(약 500만원)를 받았다. 하지만 세금(50%)과 에이전시 비용을 떼면, 손에 쥐는 액수는 별로다. "쓰는 돈도 많고, 부상 등의 이유로 '실직자'로 지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 활동으로 돈을 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현이는 뜻밖의 말을 했다.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살 찌는 체질이라면 다이어트 스트레스 때문에 톱모델이 되거나 오래 활동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평소에는 '절대'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 큰 키가 더 커보이기 때문. 해외 패션쇼에서는 최고 28cm 하이힐까지 신어 봤다.
이현이는 2010년 1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세계적인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서 론칭하는 인터내셔널 여성 케이블채널 엘르TV(ELLE atAT)의 MC로 나선다. 20, 30대 리더를 대상으로 패션, 뷰티 정보를 제공하는 이 TV에서 이현이는 프라임타임 프로를 진행할 예정이다.
▶학력 : 2002년 이화여대 경제학과 입학(4학년 휴학 중) ▶신체 : 1m77, 32-24-35, 51㎏ ▶수상 : 2005년 SBS슈퍼모델 컬러플 대구상, 2007년 패션사진가협회 올해의 신인모델상, 2007년 BAZAAR magazine 올해의 모델상 ▶CF : 네이트, LGT, 현대카드V, 유진증권 현대카드 퍼플, 현대백화점, 라네즈, 버커루 등. |
패션쇼는 약 한 달 전부터 준비한다. 모델 선정이 첫 단추다. 모델은 디자이너가 의상 컨셉트에 맞춰 직접 캐스팅하거나 오디션을 거쳐 뽑는다. 무대, 음향, 조명 등과 함께 기획사에 아예 맡기는 경우도 있다. 물론 디자이너가 최종 OK를 한다. 패션쇼에 서는 모델 수는 무대 규모, 의상 수에 따라 다르다. 보통 25~30명이 무대에 선다. 모델아카데미 수강생은 대학교 1, 2학년이 가장 많다. 국내에는 현재 6개 아카데미에서 200명 정도가 교육받고 있다. 패션쇼 한달 전 캐스팅이 끝나면, 중간에 피팅이 이뤄진다. 모델 몸에 옷을 맞추는 작업이다. 이어 쇼 하루 전 혹은 당일에 리허설을 한다. 리허설은 보통 두 차례 이뤄진다. 먼저 동선을 체크한다. 이어 의상, 헤어, 메이크업을 다 갖춘 상태에서 확인한다. 이때 연출자가 등장 순서를 정한다. 패션쇼가 진행되는 동안 백 스테이지는 난장판이다. 모델은 보통 3, 4벌 입는다. 옷 갈아입는 시간은 1, 2분에 불과하다.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헤어도 고치고, 신발도 갈아신는다. 이때 아무리 바빠도 소리는 못 지른다. 표정과 제스처로만 의사를 표시한다. 모델 1명당 헬퍼(도우미) 1명이 붙는다. 도우미는 대개 의상디자인학과 학생들이다. 당연히 민망한 장면이 많이 생긴다. 하지만 신경쓸 여유가 없다. 남자 모델, 여자 도우미라도 마찬가지다. 백스테이지 노출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은 없다. 쇼는 15~20분 가량 소요된다. 7시에 쇼가 시작되면, 모델은 오전 9시부터 준비한다. 후배부터 시작한다. 헤어, 메이크업을 하는데는 2, 3시간 필요하다. 스태프는 8명 정도다. 이어 12시쯤 현장에 도착,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운다. 두세 그릇 먹는 모델도 있다. 이어 리허설, 무대 체크, 정리 정돈을 거쳐 관객 입장이 시작된다. 모델들은 그 사이 간식, 과일, 커피 등을 하루 종일 먹는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밥 없으면 모델들이 엄청 화를 낸다"고 토로했다. 이렇게 먹어도 몸매 유지가 될까. 이 관계자는 "타고난 사람들이다. 요즘엔 눈물을 머금고 살을 빼는 모델은 드물다. 20% 정도만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했다. 에피소드도 많다. 워킹이 안좋거나 동선이 틀리면 디자이너에게 혼나기도 한다. 이때 육두문자를 쏟아내는 사람도 있다. 모델이 무대에서 떨어지거나 옷이 흘러내리는 경우도 있다. 하이힐이 벗겨지기도 하는데, 노련한 모델은 이를 연출한 것처럼 꾸며 위기를 모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