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은 원래 신라 땅이 아니었다. 우시산국이나 굴아화촌이라는 성읍국(城邑國) 단계에 신라에 흡수되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파사왕이 굴아화촌을 정복한 것이라 기록돼 있다. 주변에는 언양지역의 거지화현(居知火縣) 웅촌의 우화현(于火縣) 강동의 율포현(栗浦縣) 서생의 생서량군(生書良郡)이 있었다. 굴아화촌의 중심은 지금의 울주군 범서읍 굴화를 비롯한 범서 일대나 중구 다운동 고분군 유역, 울주군 청량면 문수산 아래 자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한시대 아니면 신라 사로국 시기에 있었던 굴아화촌. 삼국사기의 한 줄 기록만 전할 뿐 오늘까지 신화나 설화 하나 남은 게 없다. 초기 국가 형태의 굴아화촌에 정말 이야기가 없었을까? 팩션(faction)이라도 하나쯤 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냥 '게으르게 걸을 요량'으로 태화강변 굴화(屈火) 마을로 나선다. 문수고등학교 뒤 강둑에서 징검다리를 보면서 걷기 시작했다. 굴화·장검·백천을 지나고 구영교를 건너 'U'자로 돌아 장구산, 배리끝으로 되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 30분. 아직 태화강 정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전거 도로나 조깅 코스는 징검다리 부근에서 끝나고 비닐하우스 논밭이 이어진다. 십리대밭도 삼호섬을 끝으로 단절돼 있다. 장검마을에서 강 건너 보이는 장구산 아래쪽에 버짐처럼 작은 대밭이 한 곳 있을 뿐이다.

다행히 장검마을에는 1908년 3월 첫 예배가 열렸다는 수정교회가 101번째 성탄을 준비하고 있고, 예전 번성했다는 옹기굴의 희미한 흔적이나마 더듬을 수 있다. 지금은 국도 24호선으로 마을이 나뉘어져 있지만 문수산을 뒤로하고 마을 앞에 넒은 들판과 태화강이 펼쳐져 있으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잘 갖춘 굽은 강마을, 오늘의 굴화다.

◆'울산'보다 오래된 지명, '굴화'(屈火)

울산 울주군 범서읍 굴화마을 북쪽의 태화강은 모래톱 모양의 작은 섬들과 그 섬 사 이에 소(沼)라고 부를 만한 물웅덩이가 많아 철새와 물고기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자 연학습장이다.

'울산'(蔚山)은 '빽빽이 둘러싸인 곳'으로 풀이돼 왔다. 조선 태종 때(1413)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울'은 울타리 또는 마을을 둘러싼 성(城)이란 뜻이니 울산은 성으로 둘러싸인 성의 나라였다. 굴화 맞은편 구영리의 본래 지명이 옛 구(舊)자에 병영 영(營)자를 사용한 것도 이곳에 중요 군사시설이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울산보다 더 오랜 이름이 굴(아)화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굴아화(屈阿火)는 굽은 물길 즉, 굴곡진 태화강 모양을 표현했을 것이다. 언양 반천에서 다운동까지 구불구불 흐르는 태화강의 굴곡을 보면 짐작이 가는 말이다. 그 뒤 하곡(河曲 또는 河西)으로 변했고 울주(蔚州)·학성(鶴城)·개지변(皆知邊)·화성(火城)·공화(恭化)·흥려(興麗)·태화(太和)등으로 불리다 지금의 울산(우시산국)이 되었다 한다.

향토사 연구의 권위자였던 고(故) 이유수 선생은 성읍국가 굴아화의 영역이 범서뿐 아니라 청량·언양·농소까지 포함되었다고 밝혔었다. 또한 그 중심은 현재의 굴화가 아니라 구영리와 다운동의 경계에 있는 범서산성이나 다운동 고분군 일대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 정도의 넓은 영토였으면 문수산 아래 영축마을과 영취사지도 넓게는 굴(아)화의 땅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삼국유사 탑상편 영취사조에 굴(아)화를 뜻하는 '굴정역'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그 애달픈 내용은 이러하다.

"…(초략) 재상 충원공이 굴정역 동지야에서 매가 꿩을 잡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매를 피해 꿩이 필사적으로 새끼를 데리고 우물로 들어가자 매는 하늘에서 꿩을 내려다 볼 뿐 차마 덮치지 못하더라. 재상이 가서 보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꿩은 양 날개를 펴 새끼 두 마리를 품은 채 죽어 있었고 우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꿩의 처절한 새끼 사랑에 매도 감히 덮치지 못한 것이었다. 뜨거운 감동을 받은 재상은 신문왕에게 사실을 말하고 현의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절을 세워 영취사라 했다."

◆지금의 굴화는 온통 도로 공사 중

지금의 울산 울주군 범서읍 구영리에서 중구 다운동으로 이어지는 옛 길. 좁지만 포 근하고 예스러운 멋을 가졌다. 그렇더라도 시민들이 찾아 걷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사라지게 될 길이다.

굴화 주변의 태화강은 모래톱 모양의 작은 섬들과 그 섬 사이에 소(沼)라고 부를 만한 물웅덩이가 많다. 물 위에는 청둥오리·해오라기·백로들이 노닐고 물억새와 마름, 민물몰 등 식물들이 웅덩이를 덮고 있다. 오뉴월이면 각시붕어들이 말조개와 함께 혼인색을 자랑하는 곳이다. 태화강은 어디를 가나 철새와 물고기 관찰을 위한 자연 학습장으로 그만이다. 물 맑은 강 풍경과 함께 태화강을 걸으며 얻는 덤이다.

30분을 걸어 삼거리를 만나는 길목까지 굴화는 온통 도로 공사 중이다. 국도 24호선과 언양 고속도로가 굴화를 지나는 데다 해운대 고속도로의 분기점도 이곳이다. 웅장한 다릿발이 마을 위로 지나고 있는데 '고속국도 65호선 울산~포항간 제1공구' 공사가 또 한창이다.

이 공사장을 지나면 바로 구영교를 만난다. 백천마을과 천상, 구영 방향의 세갈래로 길이 나뉜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구영리다. 6만여명 규모의 범서읍 가운데 가장 번화한 마을이다. 마을로 바로 들어가는 대신 강을 따라 다시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범서산성과 장구산, 배리끝으로 가는 길이다. 참나무 숲과 강 사이에 난 산길은 넓이가 한 폭이 채 되지 않는다. 이번에 밟은 구간에서 가장 걷기 편하고 예스러우며 포근한 오솔길이다. 일제시대 신작로가 나기 전까지 울산에서 언양 가는 사람들이 다녔다고 한다.

◆세월따라 생기고 사라진 울산의 길

사람은 필요에 따라 걸으며 길을 내왔다. 예전의 길이 사라지면 또 새 길을 내고 또 다른 새 길을 만들기도 한다. 울산에도 많은 길들이 만들어졌다 사라졌을 것이다. 반구대인들의 고래 사냥길과 동축사를 남긴 서축인들의 해양실크로드, 처용이 오고 박제상이 떠났던 바닷길, 경주 귀족들과 화랑들의 길….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왕자들의 망국의 사연이 얽힌 문수산과 헛고개 설화도 울산의 길 위에서 만들어졌다. 마채염전의 소금을 싣고 다니던 길과 강동 어민들이 생선을 이고 넘었던 달령재, 빨치산들의 신불산 길과 사명대사의 길도 울산에 있었던 길이다.

옛 길은 선조들의 일상이 묻어 있고 많은 사연들이 스며 있다. 울산의 옛 길들은 울산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소중한 곳이다. 길은 걷지 않으면 잊혀지고 사라진다. 굴화를 돌아나오는 이 길 역시 걷고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될 울산의 옛 길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