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0월 3일자 조선일보는 제호부터 달라져 있었다. 필체는 더욱 힘이 있어졌고, 제호 바탕에는 가로줄을 쳐 중후한 느낌을 더했다. '혁신 조선일보'의 첫 호였다. 전국에 10만부가 무료로 배포됐고, 경성(京城)에는 이후 5일 동안 새로운 조선일보를 무료로 배달했다.

조선일보의 '혁신'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해 9월 조선일보사를 인수한 신석우(申錫雨)는 민족의 사표로 추앙받던 이상재(李商在)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에 취임했다. 새 경영진은 9월 14일 '경영의 주체가 변경된 본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본보를 경영하는 주체의 변동은 금일로부터 전연(全然)히 경신된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 조선 전 민중의 기대에 부응코자 한다"고 선언했다.

'혁신 조선일보'는 '민중의 신문'을 천명하며 언론사(言論史)에 기록되는 '최초' 기획들을 잇달아 터뜨렸다. 한국 신문 사상 최초의 4컷 연재만화 '멍텅구리'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멍텅구리'는 키다리 '최멍텅'과 땅딸보 '윤바람'이 기생 '신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통해 민중의 애환을 대변했다. '멍텅구리'는 학예부 기자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의 작품이었다. 그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에서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으로 이어지는 화풍의 맥을 이은 정통 동양화가였다. "멍텅구리라는 말이 갑자기 유명해져 유행어처럼 되었다"고 할 정도로 '멍텅구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2년여간 600회 가까이 연재됐다.

현장체험 르포인 '변장 탐방'도 새로운 기획이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군밤장수·인력거꾼·빵장수·행랑어멈 등으로 변장하고 민중의 어려운 삶의 현장을 전했다.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출동 전 기자의 사진을 미리 싣고, 변장한 기자를 찾아내면 상금을 주는 '이벤트'도 벌였다. 변장 기자의 출동이 예고된 지역과 조선일보 정문 앞에는 변장 기자를 찾아내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부인 견학단' 행사도 장안의 화제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매주 한 차례 은행·발전소·전기회사 등을 견학시키는 행사였다. 행사에 참여한 한 여성은 "세상 형편이나 알고 죽으려고 부모 몰래 나선 길"이라며 "이같이 샅샅이 보고 듣고 나니 새삼스럽게 눈 하나가 더 떠진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을 안내하고 기사를 쓴 민간지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는 "부인 견학단은 온 장안 부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가장 흥미 있는 일이 됐다"며 "그때까지 쓰개치마를 쓰지 않고는 거리에 나서지 못하던 부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구속을 벗어버리고 서울 장안을 활보하게 만든 크나큰 공을 세웠다"고 부인 견학단의 의의를 평가했다.

1924년 12월에는 무선 송수신기를 설치하고 최초의 라디오 공개방송을 개최했다. 공개방송 첫날인 17일 오후 1시 서울 수표동 조선일보 사장실에 설치된 방송실에서 공개방송을 알리는 최은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송은 다채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의 연설,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 성악 공연 등이 주요 프로그램이었다.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종로 우미관에 모여 있는 청중에게 전달됐다. 군중은 우미관 옥상에 설치된 고성능 확성기를 통해 방송을 들었다. 반응은 대단했다. 조선여자청년회 회장 신알버트는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평생에 이 같은 신기한 조화를 볼 줄은 뜻도 하지 않던 바"라고 했다. 당시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사람이 둘만 모이면 아주 신기한 것이나 본 듯 방송 이야기로 판을 쳤다"고 술회했다.

'혁신 조선일보'에 대한 민중의 호응은 뜨거웠다. 해외의 민족지사들도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은 "조선일보가 개혁 진보의 방법을 취하야 금아(今我·지금의 나)는 고아(古我·예전의 나)가 아니란 색채를 발표하니 기축(祈祝·축하의 기원)을 공헌(貢獻)하노라"는 축전을 보냈다. 미국에 있던 서재필은 "(조선일보의) 장래 발달은 무궁하고 귀보(貴報)의 은연중 노력이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