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3월 5일 창간15주년을 맞은 조선일보는 신문 2면에 '잔주접을 훨훨 떨고/朝鮮第一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의 다짐을 게재했다.

'개인도 십오세면 잔주접을 다 떨고 혈기방장한 성장기에 이르는 것과 같이 우리 조선일보도 이제 열다섯살을 먹으며 성인(成人)의 의기(意氣)로써 일대 비약을 하게 되었다. 만천하 독자 제씨여, 우리와 함께 조선일보 만세를 부르사이다. 우리는 이 좋은 날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독자 제씨에게 감사드리는 동시에 십오년 동안 잔주접을 떨 때까지 이 신문을 위하여 정신으로 물질로 희생하신 선배 제씨에게 감사함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더불어 '本報十五週年小史(본보십오주년소사)' 연재를 통해 창간 이후 처음으로 조선일보의 역사를 회고했다. 그만큼 15주년을 맞는 조선일보 임직원 및 독자들의 감회가 컸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4월 28일자로 지령(紙齡) 5000호를 발행한다. 반만년 역사를 강조하는 우리 민족에게 지령 5000호의 의미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특별사설 '지령5000호(紙齡五千號)'에서 이렇게 말했다.

1935년 6월 10일 준공된 조선일보 태평로 사옥. 지하층을 포함한 5층 건물로 경성 중심가 최대 규모의 건물이었다.

'본지는 금일(今日)로써 지령 제5000호를 맞이한다. 오천일이라 하면 짧다면 짧다 할 수 있지만 조선 사회로서는 결코 짧은 일수가 아니다. 특히 본지의 최근 십수년같이 복잡 기구했던 사정으로 보면 실로 5000년 이상의 세월과 마찬가지의 감이 있다.'

'성년(成年)' 조선일보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사건은 6월 10일 태평로 조선일보 사옥의 준공이었다. 원래 조선일보 사옥은 연건동에 있었는데 계초 방응모의 인수 직후인 1933년 12월 태평로 1가의 2층짜리 건물로 이사했다. 그리고 1934년 3월 덕수궁 부속 건물이었던 덕안궁 자리에 신사옥을 기공해 1년3개월 만에 서울 한복판에 최대 규모의 빌딩이 세워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한 신문사의 사옥 마련이 아니었다. 사옥 준공날 조선일보가 '本社新社屋(본사신사옥)과 사회적 의의'라는 사설을 실은 것도 그 점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수도 大京城(대경성)의 중앙, 태평통에 지하실 아울러 5층, 건평연평 1200여평의 굉장한 大社屋(대사옥)을 가진 大新聞社(대신문사)를 두었다는 것은 이것을 사회적으로 보아도 조선민족의 일대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自畵自讚(자화자찬)도 아니요 我田引水(아전인수)도 아니다.'

이어 사설은 다음과 같이 그 의의로 세 가지를 지적한다.

'외국인으로 대경성의 중앙, 태평통을 지나다가 巍然(외연)히 서있는 본사의 위용을 보고 그것을 만든 돈도, 경영도 순전히 조선 사람의 힘으로 된 것임을 듣는다고 하면 그들은 조선 민족의 문화에 대하여 평소에 가지던 이상의 敬意(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200명을 수용할 만한 3, 4층 통으로 된 대강당을 필두로 100명 이상이 회합할 수 있는 회의실 서너개를 가지고 있다. 모든 회합에 있어서 본사 대강당 외 서너개의 회의장소를 (조선 민중) 일반이 이용해준다면 그 이용의 민족적 가치는 얼마나 크며 문화의 향상 및 보급은 얼마나 클 것이냐.… 이제 본사 신사옥의 장관을 본다고 하면 누구나 삼십만원의 위력을 깨닫는 동시에 뜻있는 부호의 사업열을 야기하는 일대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시 말해 태평로에 등장한 조선일보 신사옥은 대외적인 자부심 제고, 민족문화의 함양, 부(富)의 사회적·민족적 환원 촉구 등의 의의를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일보 태평로 신사옥 준공 직후인 7월 6일 신사옥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신문문화전람회'가 열렸다. 전람회는 본사관·과학관·역사관·세계관으로 구성돼 있었다. 본사관에는 조선일보가 걸어온 과거를 실물과 통계·모형으로 전시했고, 과학관에는 신문 제작에 관련된 각종 과학 기자재의 실물과 모형을 전시했다. 역사관은 국내 신문과 잡지 창간호 85종을 보여주었고, 세계관에는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실린 신문, 영국 최초의 주간신문 등 60여개국 1600여 신문이 전시됐다. 12일의 전람회 기간 동안 방문객이 2만명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