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 지하철 3호선 학여울역. 차량에서 내린 승객들이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승객들을 따라 가보니 표지판에는 ‘1번 출구’ 하나만 적혀 있었다.

출구를 나오니 왕복 9차선과 11차선이 만나는 교차로가 펼쳐졌다. 주변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지하철역 출구는 방금 나온 1번 출구가 전부였다. 왜일까.

◆넓직한 교차로에 지하철 출구는 달랑 하나

서울 지하철역 중에서 ‘단일 출구’인 역은 4곳 뿐이다. 지하철 2호선 신답역은 청계천과 바로 붙어 있어 출입구를 더 낼 수 없는 구조다. 5호선 마곡역은 주변이 온통 논밭이고, 6호선 독바위역은 주택·건물로 둘러싸인 탓에 출구를 뚫을 자리가 없다.

반면 학여울역은 넓직한 교차로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쌍용아파트와 우성아파트, 서쪽으로 은마아파트, 남쪽으로 미도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총 8300여 세대 규모의 대단지다. 출구를 만들 자리도 비교적 넉넉하다.

상식적으로는 지하철역 출입구가 최소 3곳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구조다. 그러나 출입구는 단 한 방향, 그것도 아파트 단지가 아닌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 쪽으로 뚫려있다. 게다가 학여울역이 준공된 1993년에는 SETEC 자체가 없었다. 유일한 출입구를 애초 공터였던 곳에 만든 셈이다.

◆교차로 밑에 상수도·가스관 가득, “통로 내기 어려웠다”

서울메트로와 관련 기관들은 "애초부터 출입구를 더 내기 힘든 구조였다"고 했다.

보통 교차로 근처에 지하철역을 만들 때는, 교차로 바로 밑에 역사를 짓는다. 그러나 학여울역의 경우, 교차로 아래 지반에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대형상수도관·가스관이 가득 묻혀 있었다.

당시 학여울역 설계·계획 담당자 백모(63)씨는 “아파트 단지 바로 밑에서 공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차로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공터 밑에 역사 위치를 정했다”며 “또 역사 위치상, 교차로 4방향에 모두 출구를 내려면 100m가 넘는 지하통로를 뚫어야했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이용할지 의문이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학여울역을 이용할 때마다 남부순환로(왕복 9차선)와 영동대로(왕복 11차선)를 횡단보도로 건너고 있다. 쌍용아파트에 사는 장민경(22·대학생)씨는 “지하통로가 따로 없어서 학여울역에 갈 때마다 대로를 건너가는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근처 은마아파트에 살 때는 길을 두 번 건너는 게 번거로워 인근 대치역에 가거나 버스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3호선 대치역과 걸어서 7분거리, 이용률은 1/4도 안돼

현재 이곳 주민 중 상당수는, 학여울역 대신 같은 3호선인 인근 대치역을 이용하고 있다.

지난해 하루 평균 학여울역을 이용한 승객수는 3804명으로 인근 대치역(1만5137명)의 4분의 1 수준이다. 지하철 1~4호선 전체 116개역 중에서는 111번째였다. 413억여원의 공사비를 감안하면, 저조한 이용률이다.

주민들로서는, 굳이 횡단보도를 1~2차례 건너서 학여울역까지 갈 필요가 없다. 학여울역과 대치역 간의 거리(역사 가운데 기준)는 불과 763m로, 지하철 3호선 역간 평균거리(1170m)에 크게 못 미친다. 출입구 사이 간격으로 따지면 채 490m도 되지 않는다. 도보로 7분 거리에 지하철역이 또 있는 셈이다.

이런 연유로 주민들 사이에서는 “굳이 이곳에 지하철역을 지을 필요가 있었나”, “이곳에 사는 높은 사람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돌기도 했다. 인근 우성아파트에 사는 최모(59)씨는 “‘학여울역이 애초에 지어질 역이 아니다보니 가까운 대치역 쪽으로는 출입구가 안 났다’는 소문도 들었다”며 “대치역쪽으로 출입구가 나면 아파트 하나에 지하철역이 두 개가 되는 셈이지 않느냐”고 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도시기반시설본부 이광세 토목부장은 "학여울역은 애초 서울시 소유였던 공터 자리를 나중에 개발할 것을 염두해 두고 세운 역"이라고 했다.

◆출구 더 만들어달라는 주민들, 반대하는 주민들

이곳에서 만난 몇몇 주민들은 “애초부터 일부 주민들은 아파트 단지 쪽으로 출입구를 만드는 걸 반대했다”고 했다. 가뜩이나 외진 지역에 지하철 출구를 만들면 부랑자나 불량 청소년이 몰려들어 우범지역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년 넘게 학여울역 근처에서 부동산을 운영한 박모(56)씨는 “주민들이 부녀자 치안 문제 등을 내세워 출입구 건설을 반대했다”며 “이 문제로 주민들이 반상회까지 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반면 출입구를 더 내달라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1992년에는 ‘교차로 네 방향, 또는 적어도 두 방향에 출입구를 설치해달라’는 민원이 서울메트로에 들어왔다. 완공 이후인 2001년에는 ‘쌍용아파트 쪽에만이라도 출구를 만들어달라’는 민원이 강남구청과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에 접수됐다.

2000년대 들어 서울메트로는 쌍용아파트 쪽에 '2번 출구'를 내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25억원 가량의 공사비와 유지관리비가 걸림돌이 됐다. 서울메트로 홍보실 김정환 부장은 "해마다 수천억대의 적자를 내는 서울메트로 형편상 공사비를 부담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