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제생당'의 이경봉(李庚鳳)과 종로 '화평당'의 이응선(李應善)〈오른쪽 사진〉은 한말 의약업계 최대의 광고주였다. 이경봉은 '청심보명단'과 '삼용대보원(蔘茸大補元)'의 특허를 얻고, 국내 최초의 의약 전문지 '중외의약신보'(월간, 1909.8.25. 창간)를 발행하는 한편 의약단체를 조직하여 의약 발달에 기여했다. 중외의약신보는 "본보에 광고코저 하시는 첨위(僉位)는 본사 영업부 내 광고부 주임과 만나서 면의(面議) 하시압"이라 하여 '광고부'까지 두고 있음을 밝혔다.
청심보명단은 육군 군의 김수현(金守鉉)이 실험 제조하여 역시 군의였던 장기무(張基茂)가 유효함을 증명했다고 선전하여 약의 신뢰도를 높였다. 당시로써는 새로운 광고 아이디어였다. 광고 문안도 부드러운 대화체를 사용하여 흥미를 돋웠다. 이경봉은 1909년 11월 30일에 사망했다.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때 이경봉의 아들은 8살 어린이였으나 아버지의 이름을 승계하여 장성한 후에 제2대 이경봉으로 가업을 이었다. 당시 등록상표법은 허가받은 당사자만 행사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이경봉의 아들은 제생당의 영업을 상속받으면서 청심보명단의 상징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살려 이경봉은 사후에도 살아 있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화평당은 건위소화제 '팔보단'을 제조하던 제약회사였다. "화평당은 약업계의 광채요 팔보단은 세계인의 선약(仙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1910년 화평당 광고에는 무려 29종의 다양한 약이 열거되어 있는데 '단(丹)' '수(水)' '환(丸)' '산(散)' '고(膏)' 등으로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도록 표시하고 '한 제(一劑)', '한 첩(一貼)' 그리고 '일주분', '십일분', '일월분'에 얼마라는 가격과 양을 제시하였다.
화평당을 설립한 이응선은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1879년에 태어나 9살 때부터 한약상에서 일하다가 16살이었던 1894년에 인천에서 약국을 시작하여 경무총감부로부터 양약종상 면허를 제1호로 취득하여 영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번창하여 화평당을 설립하고 1908년에는 서울 종로 광교 부근에 화평당약방을 개업했다. 그는 일찍부터 선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고 종로에 큰 간판을 붙이는 등 영업비의 태반을 광고에 투입하였다.(조선일보, 1928.9.6., 홍현오, '한국약업사')
이응선의 영신환, 태양조경환, 자양환의 광고 캠페인〈왼쪽 사진〉(제생당과 화평당의 다양한 약 광고)은 물량도 대단했지만 표현의 다양성과 기동성, 창의성도 우수했다.(신인섭, '한국광고사') 그는 광고의 효용성에 관해서 이렇게 썼다. "아무리 좋은 약을 만들어도 파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구할 수 없을 것이고, 난치병에 신효한 약을 발명한들 병자가 그 약의 소재를 모르면 결국은 발명치 아니함과 같다. 광고는 가급적 기이한 의장(意匠)과 평이한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매일신보, 1916.3.5.) 이처럼 광고의 효과를 간파했던 이응선은 1927년 3월 1일에 사망했다.(조선일보 1927.6.3.) 이경봉과 이응선은 광고를 활용하여 약품판매에 성공을 거두었던 선구자들이지만 전염병이 유행하는 때에는 치료약을 무료로 제공하여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