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한국시각) 남자 쇼트트랙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이정수(21·단국대)는 경기가 끝나고 2시간쯤 뒤에 아버지 이도원(49)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라는 이정수의 목소리를 듣고 아버지는 울먹인 목소리로 꽤 오랫동안 아들의 대견함을 격려했다. 한참을 듣고 난 이정수는 "고맙습니다" 하는 한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이정수는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성격이다. 이런 그가 15일 시상대 맨 위에 올라서고 나서야 환하게 웃었다.
이정수의 금메달을 두고 대표팀의 에이스 이호석과 성시백의 무리한 경쟁이 낳은 어부지리(漁夫之利)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경기 초반부터 레이스를 이끈 이정수는 분명 실력으로 금메달을 따낸 준비된 스타였다. AP통신은 대회 개막 전 1500m 금메달 후보로 그를 지목했었다.
■가정 형편에 피겨 꿈 접은 누나
아버지 이도원씨는 기자에게 "집안 사정이 어려워 다른 부모처럼 챙겨 주지 못했는데…. 아들이 너무 대견스럽다"고 했다. 이씨는 "정수가 고 3일 때 진선유(2006 토리노올림픽 3관왕) 어머니로부터 '정수 생각이 나서 차를 태워주러 갔는데 비를 홀딱 맞은 정수가 혼자 빵을 먹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더라'는 얘기를 듣고는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던 기억이 있다"고도 했다.
이정수가 스케이트를 처음 신은 것은 선곡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 피겨 스케이팅을 했던 누나 이화영(22·국민대 재학)씨는 6학년 때 전국 동계체전 초등부 정상에 오른 유망주였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누나는 운동을 접었다. 1인당 월 200만원이 넘게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이후 인라인 스케이트와 웨이크 보드 선수 등으로 전향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꿈을 접어야 했던 누나의 모습은 늘 이정수를 자극했고, 그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다쳐도 한마디 않는 악바리
선수 생활을 위협하는 큰 부상도 많았지만 이정수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왼쪽 팔이 부러져 6개월을 쉬었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오른 발목의 복사뼈를 다쳐 3개월 이상 스케이트를 신지 못했다. 2005년 전국체전에선 오른쪽 발목이 돌아가 스케이트에 발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1주일 뒤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종합 1위에 오르는 투혼을 보였다.
이정수에게는 꾹 참고 이겨내는 악바리 근성이 있다. 중학 시절 눈에 띄는 성적을 남기지 못했던 그는 3학년 겨울방학 때 이준호 코치(1992 알베르빌올림픽 1000m 동메달리스트)를 만나며 한 단계 성장했다. 당시 이정수는 양 발목에 1.5㎏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5㎏의 납 조끼를 입은 채 링크를 50~60바퀴 쉬지 않고 도는 강훈련을 소화했다. 이런 가혹한 훈련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는 것이 가족들의 얘기이다. "아들이 다쳤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경우가 더 많았다. 쇼트트랙 외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다. 심심하면 간혹 혼자서 게임을 하곤 한다. 여자 친구도 없다." 아버지 이씨가 말하는 이정수는 이런 스타일이었다.
이런 이정수는 2008년 처음 국가대표의 꿈을 이뤘고, 지난해 세계선수권보다 더 치열하다는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다. 그리고 밴쿠버에서 그는 '다크호스'가 아닌 '금메달리스트'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