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학년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선행학습에 매달린다. 초등 고학년은 중학교 과정을, 중학생은 고교생 과정을 배우는 모습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다. 1~2년 정도의 선행학습은 '기본'이 됐다. 하지만 '옆집 아이가 하니 우리 아이도 시킨다'는 무분별한 선행학습에서 이제 벗어날 때가 됐다. 우리 아이는 과연 올바르게 선행학습을 하고 있는지, 선행학습이 오히려 해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자.
'독' 되는 선행학습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김태원(16·가명)군은 선행학습이 '독'이 된 경우다. 김군은 중2까지 사교육 없이 학교수업만 충실히 들으며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다 중2 겨울방학에 동네학원에 '스카우트'됐다. "학원비를 면제해 줄 테니 우리 학원에서 특목고 입시준비를 하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학원에서는 "입학 후를 생각하면 선행학습을 꼭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김군의 공부는 엉망이 됐다. 선행학습 진도를 따라가기가 힘에 부쳤고, 학교공부에도 소홀해졌다. 결국 내신 성적까지 떨어졌고, 특목고 입시에서도 낙방했다. 김군은 "선행학습을 하면서 전과 다르게 제 실력이 친구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감을 잃었다. 지난 일년간 무엇을 배웠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이희석(가명·16)군도 선행학습의 피해자다. 이군은 늘 1년 정도 앞서 선행학습을 했지만, 성적은 늘 중위권에 머물렀다. 학교 수업 태도도 나빴다. 수업시간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는 내용이 나오면 이를 과시하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선행학습의 효과가 성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니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으려 한 것이다.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쓸데없는 질문을 계속하자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이 잦았다. 또 "잘난 척한다"는 말을 들으며 친구들과의 거리도 멀어졌다.
◆선행학습은 부모의 불안과 조급증에서 시작
우리나라에서 선행학습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약 10여 년부터 점처 치열해지는 특목고·대학 입시 때문에 선행학습이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교육전문가들은 "선행학습 열풍은 학부모의 조급증과 학원의 상업적 목적이 딱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학부모가 선행에 매달리는 것은 불안과 조급증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혹시 뒤처지지 않을지 걱정스럽고, 조금이라도 앞서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행학습을 시킨다. 선행학습 정도를 성적 향상의 지표로 보는 경우도 많다. 서울 중대부고 이금수 교사는 "학부모는 항상 눈에 보이는 성과를 원한다. 그래서 진도를 최대한 빨리 나가기를 원하고 학원 또한 이런 요구에 발맞추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상공부연구소 박재원 소장 역시 "학원 입장에서는 '선행학습'처럼 좋은 도구가 없다. 학교, 학생마다 진도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복습을 해주기는 어렵지만, 선행학습은 학원에서 진도를 맞추기 쉽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선행학습,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선행학습은 효과를 보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리한 선행학습의 부작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선행학습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교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둘째, 자신의 수준보다 어려운 내용을 계속 배우면서 자신감과 공부하는 재미를 잃는다.
서울 동덕여중 이유진 교사(EBS 과학 강사)는 "자신의 수준보다 높은 단계를 공부하면서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암기를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학교 수업을 소홀히 하면서 잘못된 개념을 수정할 기회도 잃어버린다. 인천 송도고 심주석 교사(EBS 수학 강사)는 "개념을 잘못 배우고서도 자신이 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오류를 수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은 학교 수업에서 선생님이 개념을 설명해도 잘 듣지 않고 '결국 내가 아는 내용이잖아?'라는 결론만 내리죠.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데, 이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에요."
자신감을 잃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학원에 열심히 다니고, 숙제를 꼬박꼬박 한다고 해서 선행학습 과정을 잘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박재원 소장은 "아이 입장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막상 문제를 풀면 맞히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유진 교사 역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예외 없이 수업집중도와 특정 교과목에 대한 자신감이 높다. 잘못된 선행학습은 이 모두를 빼앗아간다"고 강조했다.
'약' 되는 선행학습
김영찬(14·용인 이현중2)군은 요즘 고2 과정인 수학Ⅰ을 공부하고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습지를 활용해 조금씩 앞서 공부한 것이 쌓여 현재에 이르렀다. 3~4년을 앞서 나가지만, 학교수업도 충실히 듣는다. 예전에 공부할 때 어렵게 생각했던 개념, 몰랐던 내용이 나오면 더욱 집중한다. 복습을 빨리하는 것도 비결이다. 학교나 학원에서 배운 내용은 집에 오자마자 바로 복습한다. "집에 돌아와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응용한 심화문제를 푼다. 10~15문제지만, 2~3시간 동안 해답을 보지 않고 혼자 힘으로 끝까지 풀어본다"고 전했다.
장민희(16·서울 청원여고1)양도 지금 수학Ⅰ의 로그함수 단원을 공부 중이다. 수학을 무척 좋아해 장래 진로도 수학 관련 학과로 선택할 계획이다. "한 단계씩 차례로 밟아 올라가며 수학의 재미를 느꼈다. 선행학습 한 덕분에 학교 수업도 수월하게 들을 수 있다"고 전했다. 학원에서 이미 배운 내용이라도 수업시간에 잘 듣고, 교과서의 기초·심화문제를 모두 꼼꼼히 풀었다. 장양은 "복습할 때는 쉬운 문제부터 어려운 문제까지 수준별로 문제룰 풀면서 배운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한다"고 전했다.
◆선행학습했다면, 학교 수업에서 복습하라
학교수업을 소홀히 하면 선행학습 효과 또한 물거품이 된다. 이금수 교사는 "선행학습을 했다면, 수업시간을 복습 기회로 삼아라"고 조언했다.
"'학원에서 이렇게 배웠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과연 어떻게 설명하실까?'하고 서로 비교해 보는 거예요. 다른 점을 체크해뒀다가 선생님에게 질문하면 더욱 깊이 공부할 수 있죠."
이유진 교사는 선행학습을 하고 올라온 아이들에게 '집중노트'를 쓰게 한다. 수업시간에 집중하게 하는 그만의 비결이다.
"집중노트란 백지 연습장을 준비해서 선생님의 수업내용을 요약하게 하는 거예요. 수업을 집중해서 듣게 되니까 '내가 외운 공식이 여기서 나온 것이구나!'라고 원리까지 깨우칠 수 있습니다."
◆선행학습보다 선수학습 중시하라
일부 최상위권 학생을 제외하면, 선행학습은 보통 1~6개월 정도 앞서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음 달에 배울 내용을 EBS 등 인터넷 강의로 듣는 정도면 충분하다. 심주석 교사는 "앞 단원에서 어떤 내용을 배우는지 관심을 갖는 정도의 선행학습이 좋다.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표시해 뒀다가 수업시간에 집중해 들으면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개념노트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노트를 한 권 준비해 한 단원이 끝날 때마다 교과서를 보지 않고 혼자 힘으로 배운 내용을 정리한다. 그런 다음 교과서와 비교해 보고, 빠진 내용은 다른 색깔 펜으로 채워 넣고 반복해서 익힌다.
선행학습을 하는 학생들은 기본개념 문제집을 반드시 풀어봐야 한다. 개념문제집을 풀면 의외로 많이 틀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 아는 것인데 왜 틀렸을까?' '내가 이 단원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구나!'라고 스스로 깨닫게 된다.
또 선행학습보다는 선수학습이 중요하다. 선수학습이란 '새로운 내용을 배우기 전에 자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간다면, 중학교 1학년까지의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지 점검하고 보충하는 것이 '선수학습'이다. 박재원 소장은 "현재 선행학습을 하는 학생 중 90% 이상이 선행보다는 지난 학기까지 배운 내용을 점검·복습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중학교 수학 9-나의 도형 단원은 올해 고1에 올라가는 최상위권 학생 가운데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공부는 앞으로만 나아가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며 부족한 점을 메우는 학생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또 옆집 아이와 비교하며 진도싸움을 해서는 안된다. 와이즈만 영재교육연구소 서지원 중등수학팀장은 "선행학습에서도 학생 개인차를 인정하고, 수준에 맞게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공부해야 할 내용이 매우 많은데, 엄마가 더 빨리 진도를 나가라고 독촉하면 아이는 부담을 느끼고 수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요. 수학은 앞으로 6~7년 이상 더 배워야 하는 과목임을 명심하고, 천천히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