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룻밤이었다.

11일 입적(入寂)한 법정(法頂) 스님은 12일 오전 11시 25분쯤 전날 밤을 지낸 서울 성북동 길상사 행지실(行持室)을 나섰다. 13년 전인 1997년 말 김영한 보살로부터 대원각 요정을 아무 조건 없이 시주받아 사찰로 바꾼 그는 생전에 하루도 이곳에 머문 적이 없었다. 물론 본인을 위한 방도 없었다. "내 절이 아니다"라는 이유였다.

치료 중이던 병원에서 입적 전날 제자들이 물었다. "스님, 절(길상사)로 가시겠습니까?" 법정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자신에 대해 엄격하던 스님이 길상사에서 하룻밤 묵겠다고 허락한 것이다. 11일 낮 12시 30분쯤 길상사에 도착한 스님은 제자들이 "절에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고, 오후 1시 51분쯤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법정 스님의 법구(法軀)는 12일 낮 12시 길상사를 떠나 전남 순천 송광사로 옮겨졌다. 운구는 간소했다. 스님의 평소 당부대로 입던 옷 그대로 염습한 상태로 관(棺)도 없이 평상 위에 가사를 덮은 채 극락전 앞으로 옮겨졌다. 평상은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서 쓰던 대나무 평상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절차는 간소했지만 길상사를 가득 메운 추모객들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소리가 경내에 가득한 가운데 법정 스님의 법구는 극락전 앞마당에 대기하던 영구차로 옮겨졌다. 법정 스님의 법구를 운구하던 8명의 스님들은 평상을 약간 내렸다 올리며 부처님께 마지막 3배(拜)를 올렸다. 지켜보던 추모객들은 눈물을 훔쳤고 일부 오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소유의 삶,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12일 낮 서울 길상사에서 순천 송광사로 떠나는 법정 스님 법구 행렬을 조문객들이 배웅하고 있다.

이날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추모객들로 가득했다. 밤새 이어지던 추모 물결은 이날 오전 10시를 넘으면서 일주문(一柱門) 밖 도로까지 이어졌다. 이웃 종교인들의 발길도 계속됐다. 수도복 차림의 프란치스코회 외국인 수사는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프란치스코회와도 가깝다"고 말했다.

서울을 떠난 법정 스님의 법구는 5시간을 달려 오후 5시쯤 스님의 출가 본사(本寺)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에 도착했다. 송광사 앞 공터에서 빈소가 마련된 문수전까지 300여m 길 양옆에는 3000여명의 불교신자들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스님을 맞이했다. 합장하던 신도들은 스님의 법구가 지나가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홍원심(49·순천 조례동)씨는 "스님께서는 평소 직접 공양을 하시는 등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을 살았던 분이었다"며 "스님의 큰 뜻을 깊이 되새기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흐느낌과 뒤섞인 염불을 뒤로 한 채 법구는 스님 10명의 어깨에 걸쳐져 빈소까지 천천히 운구됐다. 문수전에선 스님 200여명이 법정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법정 스님의 빈소엔 그 흔한 과일도 떡도 없었다. 영정을 중심으로 국화 20송이와 향로, 촛대 2개, 병풍이 전부였다. 문수전에 안치된 법구는 13일 오전 11시 2㎞ 떨어진 인근 야산 다비장으로 옮겨진다. 다비준비위원회 진화 스님은 "다비식에서는 조사(弔辭)와 만장(輓章·망자를 애도해 지은 글을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이 일절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비식 뒤에는 사리도 수습하지 않고, 탑도 세우지 않는다. 송광사 총무국장 진경 스님은 "'큰스님'의 다비식을 이렇게 간소하게 치르는 것은 처음"이라며 "스님은 생전에 '내가 어떻게 가는지 봐라'며 가장 간소한 장례를 부탁했다"고 말했다.

한편 법정 스님의 49재는 4월 28일 송광사에서 열릴 예정이며, 서울 길상사에서는 3월 21일 오전 10시 추모법회가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