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축구경기 심판 매수와 승부 조작이 사실로 드러났다. 대학 축구감독이 심판에게 뇌물을 줘가며 경기마다 승리를 한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연세대고려대의 정기 스포츠 행사(연고전)가 한창이던 지난해 9월 11일 밤 당시 고려대 축구부 감독 김모(42)씨가 지방에서 올라온 심판들이 묵는 모텔로 찾아갔다. 김씨는 다음날 연세대와의 경기 주심을 맡은 이모(43)씨와 부심 윤모(41)씨를 불러내 은밀하게 속삭였다. "내일 경기에서 꼭 이기게 해주세요. 반드시 사례(謝禮)하겠습니다."

다음 날 경기에서 두 심판은 연세대 선수들의 공격이 거세질 때마다 반칙을 선언했다. 부심은 오프사이드 반칙으로 연세대 공격의 맥을 끊었다. 어이없는 반칙 선언이 계속되자 화가 날 대로 난 연세대 감독은 심판에게 거세게 항의하다 퇴장당했다.

항의하는 감독 퇴장시키고… 2009년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 스포츠 행사 축구 경기에서 고려대 축구 감독에 의해 매수된 심판이 반칙 선언에 항의하는 연세대 감독을 퇴장시키고 있다.

통상 두 대학의 정기전은 친선경기여서 선수들의 승부욕 때문에 과열되는 일은 있어도 감독이 퇴장당하는 사례는 드물다. 이날 경기는 어수선한 분위기로 끝났지만 고려대는 연세대를 2대1로 이겼다. 며칠 뒤 김씨는 약속대로 주심과 부심에게 각각 1000만원과 500만원을 건넸다. 김씨는 그러나 이날 경기만 돈 주고 이긴 게 아니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18일 김씨를 상습적인 심판 매수 혐의(배임증재)로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또 김씨로부터 돈을 받은 대한축구협회 심판 10명과 뇌물 전달을 도와준 학부모 2명 등 1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김씨는 2008년 6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전국대학리그 등 9개 경기의 심판 10명과 경기위원에게 17차례에 걸쳐 20만~1000만원씩 모두 2300여만원을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김씨의 축구팀은 심판을 매수한 9개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고 경찰은 전했다.

심판 배정을 담당하는 대한축구협회 고위 인사도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대한축구협회 경기분과 김모(68) 위원은 김씨와 친분이 있는 심판을 경기에 배정해준 대가로 돈을 받았다. 김 위원은 지난해 9월 연고전 축구대회 때도 김씨와 '거래'를 해 왔던 심판들을 경기에 배정해주고 김씨로부터 90만원을 받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김씨는 뇌물을 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심판을 직접 만나 금품을 주거나 평소 친분이 있던 학부모 2명이 운영하는 회사 종업원 명의로 만든 차명계좌를 이용해 심판에게 돈을 전달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김씨는 또 2008년 11월 베트남에서 열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할 때 선수 학부모 35명으로부터 체류비 명목으로 2900여만원을 받아 이 가운데 1200만원을 유흥비 등으로 탕진한 혐의도 받고 있다.

김씨는 학부모들로부터 매달 1인당 50만~100만원씩의 선수단 운영비를 걷었다고 경찰은 말했다. 다른 대학보다 10배 정도 많은 돈이었다. 그는 2007년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이렇게 마련된 운영비 중 1억700여만원을 가로챘다고 경찰은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학부모들은 턱없이 비싼 운영비를 내면서도 아들이 김씨에게 미운 털이 박혀 경기 출전 기회를 못 얻을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4월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 선발 때도 경쟁 감독을 눌러 '로비를 한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었다.

경찰은 "계좌 추적과 참고인 조사를 통해 김씨가 다른 심판과 대한축구협회 다른 관계자에게도 금품을 건넸는지 계속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지난해 말 계약기간이 만료돼 학교를 떠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