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스크린에서 길을 잃다 |
작은 바람에 흩어지는 몇 조각 구름. 지상의 우리는 그 구름을 만질 수 없다. 구름은 실체는 있지만, 내용은 없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감독 이준익)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과 같다. 혼신을 다해 내리쳤으나 끝내 허공을 가른 검객의 칼날이 그러할 것이다. 구름은, 허공만 가른 저 칼날은, 이제 어디에 정박할 것인가. 구름은 돌아갈 집이 없고, 칼날은 표적을 잃어버렸다.
'구르믈 버서난...'은 시종일관 갈피없이 흔들린다. 다만 아득하고 어지러울 뿐이다. 감독의 출사표는 크고 무겁다. 밑바닥에 이른 절망과 안타까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는 "(젊은이들이) 허황된, 세속적인 목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목표를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찍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감독의 뜻은 드높고 숭고하지만, 영화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다.
'구르믈 버서난...'의 시대 배경은 임진왜란 직전이다.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나온다. 혁명을 꿈꾸는 대동계 수장 이몽학(차승원), 그 이몽학을 죽이기 위해 뒤를 쫓는 황정학(황정민), 양반 서자인 견자(백성현)다. 그들 중에서 절망한 것은 누구인가. 세 명 모두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에 절망한 것일까. 무슨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이들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뒤엉키는 길항관계를 그린다.
이몽학의 목표는 명확하다. 부패한 세상을 뒤집어 엎고 왕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는 대동(大同)의 깃발을 높이 든다. 리더 정여립을 살해하고, 지방 관아를 접수하고, 마침내 궁궐로 진격한다. 그의 내면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정쟁에만 몰두하는 동인과 서인, 갈팡질팡하는 왕에게 절망했다. 반란에 미온적인 정여립에게도 그랬다. 그는 스스로 역적의 수장이 된다. 그런데 영화는 이 지점에서 휘청거린다. 이몽학의 진정한 꿈은 왕이 되는 것인가, 왜구와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키는 것인가.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양반이 아니면서도 갓 쓰고, 도포 입고, 게다가 칼싸움에도 능한 이몽학의 캐릭터만큼 혼란스럽다. 또 하나. 이몽학의 꿈은 혹시 허황되거나 세속적인 것은 아닌가?
황정학의 내면도 구름에 덮여 있다. 그의 지론은 확실하다. "칼 쓰는 자는 칼 뒤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 앞에 있고 싶다"는 이몽학과 대립관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황정학의 칼은 왕이나 사대부를 겨누지 않는다. 그는 이몽학에게 비장하게 말한다. "한양으로 가지 말라." 그는 이몽학의 헛된 야망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여립의 복수를 꿈꾼다.
이몽학과 황정학의 갈등은 영화의 중심축이다. 그런데 이 구도는 어딘가 이상하다. 이몽학은 반란을 꿈꾸고, 황정학은 그런 이몽학의 제거를 꿈꾼다. 하지만 왕이 되려는 자를 제거하는 것은, 왕이나 사대부의 몫이다. 그가 이몽학을 제거해 얻는 것은 복수 밖에 없다. 그래도 갈등 관계가 유지되려면, 이몽학과 황정학은 좀 더 치열하게 부딪쳐야 한다.
견자는 더 이상하다. 양반집 서자로서 신분차별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나는 인물이다. 그런데 "지금 왕도 서자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했던 아버지가 이몽학의 칼에 죽자, 견자는 원수를 갚겠다고 나선다. 황정학과 한 패가 된다. 목표가 같기 때문이다. 견자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몽학과 진검승부를 벌인다(초보 검객과 당대 최고 검객의 대결 결과는 비상식적이다). 왜구에 쫓겨 도망친 왕이 앉았던 옥좌에 앉는다. 그럼 견자가 주인공인가?
이몽학이 도착한 궁궐은 텅 비어있다. 모두 도망갔다. 화살을 쏘았으나 과녁이 없어진 것이다. 졸개들은 왜구의 화승총 앞에서 낙엽처럼 쓰러진다. 여기서 견자가 등장해 맹활약한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영화는 애매하고 또 모호하다. 인물의 성격, 갈등, 서사 전개 등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다. "네 꿈 안에는 내가 없지만, 내 꿈 안에는 네가 있다"는 기생 백지(한지혜)의 고백은 느닷없고, 극도로 희화화된 왕과 신하들의 언행은 영화의 톤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그래서 관객은 혼란스럽다.
감독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관객은 영화에서 어떠한 절망이나 희망, 세속적이지 않은 목표도 발견할 수 없다. 감독은 '님은 먼 곳에'의 실수를 되풀이한다. 제작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다. 그가 거대 서사를 담아내는데 숨차지는 않을 것이다. 강호의 검객들은 최소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이준익도 그들처럼 영화를 간결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영화가 구름을 벗어나지 못한 달이 되지 않도록.
< 기획취재팀ㆍ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