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대륙에 중국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중국은 자원 확보를 목표로 남미 대륙에 접근, 이젠 미국을 밀어내고 남미 주요국의 제1 교역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커져가는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이 외치는 대국굴기(大國掘起·큰 나라로 우뚝 섬)와 화평굴기(和平掘起·평화적으로 우뚝 섬)가 남미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칠레와 파나마, 페루 3개국을 둘러봤다.
1951년 칠레 추키카마타 광산. 미국 광산업체 '아나콘다'가 개발한 이곳은 당시 세계 구리 생산량의 30%를 점하고 있던 거대한 광산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의대생으로 남미를 여행 중이던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는 "양키들은 불쌍한 노동자들에게 단돈 1센트도 더 주지 않으려고 하다가 파업으로 매일 수천페소를 날리고 있다"며 "냉혹한 효율과 무기력한 분노가 거대한 광산을 움직이고 있다"고 표현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자들은 진폐증으로 고통받았고, 1만명 이상이 숨졌다. 분노는 그를 사회주의 혁명가로 이끌어 쿠바 공산화에 동참하게 했다.
지난 11일 추키카마타. 칠레 국영 광산업체 코델코(Codelco)의 홍보담당자인 파울라 알바라도(34)씨는 "이번 달에 우리 회사의 구리가 상하이 금속거래소에서 거래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장에 직접 진출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칠레 정부는 1960년대에 광산지분의 51%를 확보한 뒤, 1973년 이를 완전히 국유화해 코델코를 세웠다. 코델코는 런던과 상하이에서 구리를 직접 거래한다. "왜 뉴욕거래소는 없죠?" 대답은 간단했다. "중국이 더 중요하니까." 지난 3월 기준 중국의 구리 소비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약 36.5%를 차지,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 전체 소비량(14.7%)의 약 2.5배에 달했다.
알바라도씨는 추키카마티나(추키카마타 광산에서 태어난 여성)다. 그녀는 "1년 전부터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국 대사관의 장학생 선발에도 지원해놓은 상태"라며 "경쟁률이 3대 1 정도 되는데 행운을 빌어달라"며 웃었다. 광산의 홍보담당자마저 자신의 미래를 중국에 베팅하는, 체 게바라가 상상도 못한 세상이 열렸다. 그의 반미 루트가 중국 굴기(掘起) 루트로 변하고 있다.
◆폐허가 된 미국의 영광=추키카마타 앞 광산촌. 은행과 극장, 수퍼마켓 등의 간판은 여전했지만,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알바라도씨는 "광산이 점점 커지면서 노동자들은 2008년 칼라마 시내로 완전히 옮겨갔다"고 말했다. 시내 한쪽에 조그맣게 서 있는 '아나콘다 스타디움'이란 간판만이 옛 미국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운전을 하는 펠리페씨는 "이제 미제(美製)는 이 차(GM) 하나밖에 안 남았다"며 웃었다.
체 게바라가 봤던 진폐증에 고통받고 샤워시설도 없이 열악하게 살아갔던 광산 노동자들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코델코 직원들은 지난 2009년 1인당 약 3만달러의 연말 보너스를 받았다. 칠레의 1인당 GDP(1만달러)의 약 3배에 달하는 액수다.
추키카마타 안의 구리 제련공장. 6~8장의 평평한 구리판이 깔리면 그 위에 파도모양으로 구부려진 구리판이 2~3개씩 올려졌고, 그 위에 다시 평평한 구리판을 깔았다. 이렇게 사람 키높이만큼 쌓인 구리판이 축구장 절반 면적을 채우고 있었다. 이곳 책임자 크리스티안 에가냐(Egana)씨는 "가운데 물결판을 넣는 것은 중국에서 요구하는 형식"이라고 했다.
◆중국은 왜 남미에서 굴기 하나=남미는 역사상 강대국들의 자원공급 기지 역할을 해왔다. 때문에 남미 경제가 어디에 의존하고 있는가는 당시의 패권 국가가 어느 나라인지를 잘 보여준다. 100년 전인 1910년 칠레의 1위 수출 대상국은 대영제국으로 전체 수출의 무려 41.3%를 차지했고, 다음으로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던 '젊은' 미국(21.31%)이었다. 당시 미국은 3위로 물러난 독일(19.99%)을 물리치고 세계의 중심을 유럽에서 북미로 돌리고 있었다.
한 세기가 지난 2009년 칠레의 1위 수출 대상국은 중국(23.9%)으로 수출액이 미국(11.3%)의 2배가 넘는다. 브라질에선 2008년부터 중국이 1위 교역국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전체 수출의 80%를 원자재로만 보내고 있을 정도다. 페루에서도 올 1분기 중국이 1위 교역국으로 부상했고, 아르헨티나에선 중국이 브라질에 이어 2위 교역국이다.
◆이키케, 사막 속 중국의 전초기지=지난 14일 이키케(Iquique). 칠레 정부가 아타카마 사막에 사람을 살도록 하기 위해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인공적으로 만든 도시다.
류쉐량(劉學亮)씨는 1991년 중국 외교부 직원으로 칠레에 왔다가 이키케에 자리 잡았다. 류씨는 "현재 이키케에서 움직이는 상품의 87%가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말했다. 그는 "1990년대엔 이곳에서 중국산 열쇠와 자물쇠를 파는, 사실상 철물점으로 시작했었다"며 "이후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은 중국산 광산장비나 발전기를 팔고 있다"고 했다. 철물점에서 출발한 그의 사업은 라디오 등 간단한 전자제품을 거쳐 TV와 DVD, 지금은 발전기까지 품목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키케 교민인 현석근씨는 "나를 포함해 원단 취급을 하던 한국 사람이 5명쯤 있었는데 지금은 중국산에 밀려 하나도 없고, 나도 원단에서 컴퓨터용품 수입으로 주업종을 바꿨다"고 말했다.
체 게바라가 2010년 다시 남미를 여행한다면 반미를 결심할까, 반중(反中)을 결심할까. 아니면 광산 노동자의 엄청난 보너스에 분노할 것인가.
■ 아타카마 사막 쟁탈전… 19세기 초석 발견, 강대국 각축장 돼
아타카마 사막은 초석(硝石)과 구리와 리튬의 땅이다.
불모의 땅이었던 이곳은 19세기에 화약과 비료의 원료인 초석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아타카마는 원래 볼리비아와 페루의 땅이었지만, 광산을 개발한 사람들은 칠레인들이었다. 초석이 돈이 되자 볼리비아가 국유화를 선언하고 페루가 볼리비아를 지원하면서 1879년 칠레와 2대 1로 전쟁이 벌어진다. 결과는 칠레의 승리, 아타카마의 주인은 바뀐다. 이후 초석 광산은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인들이 50% 이상 개발했고, 나머지는 독일과 칠레 사람들의 차지였다.
20세기 초엔 전기·전자산업에 필수적인 구리가 대규모로 발견되면서 미국인들이 광산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전용 주거지와 모자 색깔로 계급을 나타내는 등 차별적 행위로 현지의 인심을 얻지 못했다. 칠레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구리 광산 국유화를 단행한다. 그러나 자본 부족으로 1980년대 다시 민영기업의 광산개발을 허가해 현재 칠레 구리의 60%는 민간이 차지하고 있다. 시장 경쟁에 맡겨진 구리는 2000년대 들어 중국의 '싹쓸이' 쇼핑목록에 추가된다.
최근에는 아타카마에 '미래 에너지'로 불리는 리튬이 전 세계 매장량의 3분의 1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면서 또다시 미국·중국·일본 등 강대국들이 몰려들고 있다. 리튬은 전기배터리의 핵심 소재다. 한국도 끼어들었다. 광업진흥공사와 삼성물산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아타카마 사막의 'NX우노' 리튬 광산 지분투자를 협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