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스모그에 휩싸인 모스크바는 여전히 숨이 막힌다. 이날 러시아 기상·환경 관측기관인 로스기드로메트의 알렉산데르 프롤로프 소장은 10세기 후반 이래 1000년 동안 이 같은 더위가 관측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부터 3주째 계속된 스모그에다 이날도 낮 기온이 섭씨 36도까지 치솟으면서 시민들은 녹초가 됐다. 모스크바 환경감시 서비스는 "대기 중 일산화탄소 함유량이 정상 수치의 세 배 이상에 달한다"며 외출을 삼갈 것을 당부했다. 일산화탄소량이 평소보다 여섯배 이상 됐던 최악의 상황에서는 일단 벗어났다. 하지만 방독면을 쓰고 다니는 시민들의 모습도 목격된다.

외국인들의 모스크바 탈출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모스크바시는 정부 건물과 병원에 에어컨 시설을 갖춘 123개의 '비상 대피센터'를 마련했다. 인테르팍스 통신은 이날 "하루 새 폭염 속에 247곳의 숲에서 화재가 추가로 발생했으며, 화재로 52명이 목숨을 잃었고, 4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1000년 만에 닥친 폭염과 자작나무숲 이탄(泥炭)이 타며 발생한 화재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위협이 되고 있다.

◆러시아 밀밭은 쑥대밭

지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동안 모스크바 7월 낮 평균 최고 기온은 24도였지만 올해는 31도, 8월 평균은 35도를 기록 중이다. 폭염에다 가뭄까지 겹치면서 러시아 서부 곡창지대는 피폐됐고, 이탄이 발화하며 생긴 화재는 우랄산맥 서쪽을 스모그로 온통 뒤덮었다. 세르게이 쇼이구 비상사태부 장관은 8일 "전국에서 800건의 화재가 진행 중이며 이들 중 상당수가 통제를 벗어난 상태"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세계 곡창지대에 자리 잡은 러시아의 밀밭은 쑥대밭이 됐다.

세계 3대 밀수출국인 러시아의 기습적인 밀 수출 금지는 자국 내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다. 지난 6월 가뭄 초기에만 해도 올해 밀 수확량은 전년 대비 26% 감소한 약 7000만t, 수출량은 전년 수준인 2150만t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기상관측 시작 이후 최악의 폭염에다 가뭄이 석달째 계속되면서 흑해 연안~카프카즈 산맥 주변의 옥토 '체르노젬(흑색토)'이 황폐화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더구나 숲에서 발생한 1000여건의 화재가 밀밭을 태우면서 밀농장의 3분의 1이 피해를 당하는 등 밀 예상 수확량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낮은 6500만t 수준까지 급감할 것으로 나타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러시아 정부는 당장 국내 시장을 살리기 위해 나섰고, 오는 15일부터 연말까지 곡물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최근 중동과 아프리카로 수출될 예정이던 러시아산 밀 7만t의 계약도 취소했다. 마치 2005년 유럽행 가스 수출을 금지하면서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식량파동 가능성 경고

밀 가격은 부셸당 13달러까지 치솟은 2008년 당시 상황보다 낮은 편이지만 이런 추세가 언제 멈출지 몰라 국제시장의 수급 불균형은 당분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유엔은 "미국의 작황이 정상적인 데다 올 예상되는 세계 밀 수확량이 5억2800만t으로 지난 2008년 식량 파동을 겪은 당시 밀 생산량 4억2700만t보다 많아 식량파동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도 "남반구 주요 밀생산국 호주아르헨티나의 연말 작황이 러시아처럼 흉작으로 끝나거나, 식량 공급국이 식량을 안보화할 경우 식량파동이 예상된다"고 경고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의 밀 수출 금지는 옥수수·쌀 등 거의 모든 농산물이 기록적으로 상승한 지난 2008년 글로벌 식품 파동을 상기시킨다"고 보도했다. 당시 '식량 무기화' 바람으로 중국베트남·캄보디아 등이 잇따라 쌀 수출 통제에 나섰고, 가격 상승을 견디지 못한 아이티카메룬에서는 폭동이 발생했다.

◆李대통령, 위로 전문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9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에게 보낸 위로 전문에서 "우리 정부와 국민을 대표하여 산불로 사망한 희생자들에 대해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그 유가족 및 부상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히고, "현지 상황 및 진화 장비 수요 등을 감안해 우선적으로 신속 조달이 가능한 소방 관련 방비 및 물품 등을 러시아 측에 긴급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김희정 대변인이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