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현역 시절 최고의 테크니션이었다. 질풍 같은 기세에 상대는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그는 속설도 깼다. '스타는 지도자로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을 비웃듯 팀을 우승을 이끌었다.

그런가 하면 고2 첫째는 17세 이하 청소년대표고 중3 둘째는 "전성 시절 아빠를 빼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축복받은 농구 DNA'를 지닌 가족은 허재(46) 현 KCC 감독과 허웅(17·용산고2)·허훈(15·용산중3) 부자(父子)다.

후암동 집에서 만난 형제에게 "아버지가 스타였던 게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리 잘했어요? 옛 비디오 보니 별로던데?" (허훈) "맞아, 많이 뛰지도 않았고…." (허웅) 그 말에 허재는 기가 막힌다는 듯 껄껄댔다.

축복받은 농구 유전자를 지닌‘허재 패밀리’가 모였다. 아버지는 자신을 빼닮은 두 아들의 농구 실력에 대해“제 앞가림은 할 정도”라고 말했다. 오른쪽부터 허재 KCC 감독, 큰아들 웅, 부인 이미수씨, 작은아들 훈.

두 아들과 새롭게 시작하다

대부분 운동선수는 자식들에게 대물림을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천하의 허재'도 그랬다. 그런데 은퇴 후 미국 연수를 갔다가 KCC 감독이 돼 1년 만에 돌아오자 웅이가 농구선수가 되겠다고 엄마 이미수씨를 졸랐다.

웅이는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려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듣는 모범생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도 짧은 시간 안에 영어를 어느 정도 익혀 '가족의 통역' 임무를 도맡았을 정도로 명석했다.

처음엔 말리던 허재도 "무조건 농구를 하겠다"는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분당에 살던 허재 가족은 웅이의 '농구 유학'을 위해 허재가 다니던 용산중·고등학교가 위치한 후암동으로 이사했다.

이때 둘째 훈이도 근처에 있는 농구 명문 삼광초등학교에 전학 가면서 농구부에서 자연스럽게 농구공을 만졌다. 허재가 국내 프로농구에 지도자로 도전장을 던졌던 2005년 말 그의 두 아들이 새롭게 농구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허재의 '판박이 두 아들'

이미수씨는 "성격이나 실력을 볼 때, 두 아들을 합치면 바로 허재"라고 했다. 웅이는 지기 싫어하는 승부근성과 강단 있는 보스 기질, 훈이는 고집 세고 낙천적인 성격과 함께 아버지 뺨치는 입담을 지녔다고 했다.

슈팅 가드가 포지션인 웅이는 뒤늦게 농구를 시작해서 주전으로 뛸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 용산중 때는 주로 후보로 뛰었고 고등학교 때도 쟁쟁한 선배들에 가려 주로 식스맨으로 출전했다.

하지만 빠른 스피드와 드리블이 일품이며, 지도자들로부터 "장래성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얼마 전 17세 이하 청소년 대표로 뽑혔다. 현재 용산중 3학년으로 주장을 맡은 훈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패스나 농구 센스, 경기 운영능력이 '또래 아이들이 따라가지 못할' 수준이란다. 훈이는 "형은 아직 한 번도 받지 못한 MVP 트로피가 내게는 있다"며 스스로에 대한 자랑도 대단하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훈련을 빠짐없이 소화하는 형과는 달리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고 훈련보다는 잠자는 걸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꾀돌이'다. 허재는 두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눈이 아니라 '귀'로 봤다.

현역 감독을 맡느라 두세 번밖에 경기장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감독을 맡고 있는 후배들이 부담을 느낄까 봐 학교도 찾지 않았다. 지난 6월 작고한 허준씨가 아들 허재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자들의 경기를 빠짐없이 관전했다.

허재는 "그래도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인 것 같아 다행스럽다"고 했다. 허 감독은 큰아들 웅이에게만 딱 한 번, 일주일간 전주 KCC의 용인 숙소에 묵게 하면서 슛 자세나 패스, 드리블을 지도했다.

"목표요? 당연히 일인자죠!"

허재의 방 하나에는 현역 시절 받은 상장과 트로피로 가득 차 있다. 두 아들에게 "언제쯤 저렇게 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묻자 웅이는 "수십년"이라고 했고 훈이는 "한 3년?"이라며 큰소리쳤다. 두 선수의 목표는 뭘까?

웅이가 "일인자"라고 대답하자 그 소리를 들은 훈이가 "뭔 소리야. 내가 형 밀어내고 일인자 할 거야"라며 째려봤다. 그 모습을 본 이미수씨가 거들었다. "둘이 한 팀에서 뛰는 거 보면 좋겠지만 그러기 쉽지 않겠네."

주위에선 벌써 두 아들이 용산중·용산고·중앙대에 진학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허재의 생각은 달랐다. "미래를 강요할 생각 없어요. 1·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뛸 기회가 많은 팀이 좋겠죠? 아무래도 일찍 프로팀에 눈도장을 찍어야 하니까요."

웅이나 훈이 생각도 마찬가지다. 웅이는 닮고 싶은 선수로 아버지 대신 NBA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를 꼽았다. 훈이는 더 엉뚱하다. "아버지 플레이 스타일은 가드인 내게는 맘에 안 든다"며 "전태풍을 닮고 싶다"며 한 술 더 뜬다.

두 아들에게 한마디 더 물어봤다. 감독으로서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타임을 부르는데 작전지시보다 화를 더 내시던데요." 웅이가 비판하자 훈이가 거든다. "올해 초 우리는 우승을 했는데 아버진 준우승했으니 우리보다 못한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