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앞 도로는 경복궁 배치의 축과 틀어져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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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 도로가 틀어진 건가요? 조선시대 육조거리가 원래 그런 건지, 일제 시대 때 변경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
서울 성북구 독자 이종규씨
세종로는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 앞으로 뻗어있는 길의 이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의정부와 정부 관서인 6조(六曹), 한성부 등의 주요 관아가 길 양쪽에 있다고 해서 '육조 앞' 또는 '육조거리'라 불렸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 10월부터 세종대왕의 묘호(廟號)를 따서 '세종로'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종로의 형성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서울의 형성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서울의 도시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풍수지리사상이지요. '세종로 이야기'의 저자 유길상씨는 "정도전이 주장한 '백악주산설(白岳主山說)'에 따라 백두산과 지리산의 지세가 모인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을 도읍지의 상징축으로 정해 이 축선 위에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과 정궁인 경복궁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의 산(火山)'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禍)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경복궁의 주작대로(광화문~숭례문)는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는 도로의 폭은 넓어졌지만 방향 자체는 현재의 모습과 거의 일치합니다. 이런 사실은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육조거리 도면인 '경성부 지적원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1916년 경복궁 안에 조선의 상징축선에서 동쪽으로 5.6도 틀어진 방향으로 '日(일)'자 모양의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고, 1920년에는 남산 아래 일본 조상신을 모시는 신전인 조선신궁을, 1925년에는 덕수궁 앞에 '本(본)'자 모양의 경성부 청사를 지어 새로운 '일본의 축'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일본의 축' 역시 길의 방향을 튼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