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도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주류 인생의 직업은 접고, 여기서는 소위 비주류 인생의 직업군을 살펴보자.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며 음악을 연주하며 먹고 사는 이들이나, 동물까지 동원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곤 약을 파는 약장수 내지는 거리에서 적당한 눈속임으로 야바위를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또 밤과 낮이라는 영역을 넘나들면서, 또 인간의 죽고 사는 문제에 관여를 한 직업군도 있었는데 사형집행자, 박피공, 무덤 파는 사람, 야경꾼 등등이다.
이들은 '저급한 직업'에 속하면서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위해서 사회 구석구석에 꼭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를진데, 존경은커녕 늘 푸대접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운명들이었다. 지난번에 상세하게 언급했던 사형집행자에 대해선 생략하고, 오늘은 구체적으로 박피공과 무덤 파는 사람 그리고 야경꾼을 살펴보자
박피공이란 이름 그대로 죽은 동물의 껍질을 벗기는 직업이다. 늘 동물에 관여하는 직업이다 보니 죽은 동물들의 몸뚱이에서 나는 냄새가 이들의 몸에 늘 배어 있었고, 또 죽은 동물이 부패하면서 때때로 전염병을 퍼뜨릴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에 성(城) 바깥에서 살아야만 하는 운명의 직업인이었다. 사형집행인들처럼 이들도 일반인들과의 교류도 금지될 정도였고, 식당 같은 곳에 들어 가고자 할 때는 이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정해진 구석진 자리에서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들의 가까운 이웃은 이 사형집행인들이 주를 이루었고, 딸자식도 끼리끼리 서로 결혼시킨다. 젊은 나이에 사형당한 이들의 뼈를 추려서 사형집행인들이 부적을 만들어 팔 때 이 박피공들도 동참했다. 당시엔 이런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는데, 이렇게 일찍 죽은 젊은이들의 뼈 속엔 살아 있을 때 다 소모하지 못한 생기 있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이들도 수입을 곧잘 올리곤 했는데 예를 들자면 당연히 동물들의 껍질로 제혁업을 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동물 뼈를 모아 비누를 제조해서 팔면서였다.
무덤 파는 이는 어떠했을까? 이들도 글자 그대로 시체가 무덤에 당도할 때까지 모든 절차를 도맡아서 묻을 준비를 하는 직업이다. 한번은 죽어야 하는 인간이 다시 땅으로 갈 때 그들의 도움은 무지 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사회에서 받는 대접은 푸대접 중에서도 푸대접이었다. 그러나 여러 갈래에서 생기는 부수입은 상당했는데, 이들은 공부한 의사들 못지 않게 인체 해부를 잘 알기 때문에 다쳤다거나 부러진 뼈를 고쳐 주고는 수입을 올렸다.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사형집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유골을 팔면서 돈을 벌기도 한다. 특히 교회에서 인정 받을 정도로 종교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을 묻었을 땐 수도원측에서 원하는 신체부위-손가락 등등-를 넘겨주면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다 한다.
왜 수도원 측에선 이런 유골들이 필요했을까? 수도원은 이런 경건한 이들의 유골의 일부를 땅에 묻곤 그 부근에다 경당을 짓는다. 만약 죽은 후에 그 유골의 주인이 가톨릭의 성인 성녀로 격상되면 그 수도원은 바로 성지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컸다고 한다. 최근에 80세의 에르드빈스라는 사람의 기사가 실렸는데, 그는 이 직업인으로 약 30년간 살면서 무덤을 기계로 파지 않고 손으로 파고선 186명의 사람을 묻어 준 독일의 마지막 '무덤을 판 사람'(Totengräber) 직업인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있었던 야경꾼이란 직업인데, 중세유럽에선 500년 전부터 어두운 밤 주민들의 안녕을 위해 생긴 직업으로 '중세기의 경찰'이라고 칭한다. 이 야경꾼들은 겨울엔 9시부터 새벽 5시, 여름엔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근무했고, 이들이 순찰할 때 주로 지니는 것은 도끼와 창이 함께 붙어 있는 중세의 무기와 나팔뿐만 아니라 때로는 맹견도 함께 데리고 다니며 밤거리의 질서를 확인했다.
수상한 사람이 거리에 보이면 당시 그들은 심문할 수도 있었고 또 체포까지 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 되었다고 한다. 시계가 흔하지 않던 그 시대에 때로는 시간과 더불어 날씨까지 알려 주는 역할까지 했다. 이들이 이렇게 민중들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이었지만, 이들 역시 박피공이나 사형집행자들처럼 사회에서 천시 받았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거리의 가로등이 생기기 시작하고, 경찰들이 점차적으로 이 영역을 맡다 보니 이 야경꾼 직업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급한 직업군' 에 속했던 이들도 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이런 직업에 나선 이들이었기에, 가급적 이런 직업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쳤다 한다. 이런 생각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당시나 지금이나 다 유사한 인간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거의 모든 것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야경꾼을 보려면, 아마도 박물관에서 전시용으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당시의 '저급한 직업'에 속함에는 아랑곳 없이 현대의 야경꾼들이 유럽엔 더러 있다. 최근 한 독일인이 자기가 사는 도시가 고요하고 평화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의 파수꾼으로 자처하고 밤마다 20년간 야경꾼 노릇을 했다는 특이한 기사를 접했다.
메르치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독일인은 20년 전부터 중세기의 야경꾼 옷을 걸치고 역사적인 현실을 매일 실현하면서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한다. 또 스위스 취리히에서도 중세기의 복장을 하고 야경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는 기사를 접했는데 이들은 12월만 뺀 매달 마지막 화요일에 관심 있는 자들에겐 이들의 일을 보여주는 주는 안내까지 한단다.
자동 기계장치가 인간을 쉽게 거의 보호해 줄 수 있는 시대에 살지만, 문명의 이기가 다 갖추어지면 질수록 사람은 예전에 인간이 직접 관여했던 것에 오히려 향수를 더 느끼나 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문명에 염증을 느끼곤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 다시 이런 야경꾼의 등장은 좀 별로 이리라! 왜? 여러 가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일단 늦은 밤까지 전등불이 너무 밝은 나라이지 않는가? 독일 같은 경우는 가게 문을 저녁 6시부터 시작해 8시경이면 거의 다 닫는데 비하면 말이다. 그렇지만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이런 저런 전통의 향수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 독일인이 20년간이나 중세기 옷을 걸치고 역사적인 현실을 매일 재현했던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도 외국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호텔에 우리의 전통의상을 입고 손님을 영접하면 어떨까? 이것은 우리 전통을 세부적으로 다시 찾는다는 의미와 더불어, 우리의 전통의 맥을 일상의 직업을 통해서 재현해 본다는 의미도 되지 않을까?
비교종교학 박사 ytz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