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인하대학교 교양강좌에 연사로 초청받아 해마다 봄가을에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첫해 강연을 할 때였다. 강당을 가득 메운 300여명의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 중에 인하대학교의 '인하'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서너명쯤 손을 들었던 것 같다. 그중 한 학생에게 물었더니 "인천하고 하와이요"라고 답했다.

그 이후 봄이나 가을 중에 한 번은 이승만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강연을 한 때문인지 같은 질문을 던지면 옳게 답하는 수가 꾸준히 늘더니 지난봄에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대부분 학생들이 합창을 하듯 "인천하고 하와이요"라고 답했다. 누가 세웠냐는 물음에도 많은 수의 학생들이 입을 모아 "이승만요!"라고 답을 한다.

지금은 '인하대학교'로 불리지만 40대 이상에게는 '인하공대'라는 말이 더 친숙하다. 기자도 어릴 때부터 인하공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부모님이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 인천인 데다가 고모님 댁은 인하공대 근처였기 때문이다.

그 '인하공대'의 실질적인 설립자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1995년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시리즈를 준비하면서였다.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맞은 1952년, 전쟁 중인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하와이 교민들은 지난날 하와이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업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요청했고 이승만은 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이승만 대통령은 김법린 문교장관에게 '인하'공대를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교포들의 성금과 정부 보유 기금 100만달러, 그리고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운영했던 한인기독학원 처분 자금까지 보태져서 '인하공대'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만 묻고 싶다. 우리 역사에서 '태평양'이 우리의 바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초로 제시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승만이다. 그는 태평양을 오가며 평생을 살았고 마지막 숨도 거기서 거뒀다. 그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할 때 냈던 잡지 이름도 '태평양주보' '태평양잡지'다. 태평양이 우리의 바다일 때 미국은 지구 반대편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까운 이웃나라가 된다.

1953년 6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하공대 설립과 관련된 담화를 발표했다. 휴전문제를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던 때다. 그로부터 정확히 2주 후에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이 단행된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발표된 담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앞으로 한국과 하와이 사이에 연결과 우의를 돈독히 하여 미주까지 연결하는 징검다리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이 인천 '하와이'에 물질과 성심을 합하여 인하대학을 만들고 대학의 주지(主旨)는 공과대학을 만들어서 마치 미국의 MIT와 같은 제일 유명한 공과대학을 만들려는 것이니(중략)." 공대를 만들어 나라가 먹고살자는 노(老)대통령의 간절한 소망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런 인하공대였기에 1979년 교내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동상도 1980년대 좌경화의 미친 바람은 이겨내지 못했다. 1983년 운동권 학생들이 완력으로 동상을 철거해버린 것이다. 다행히 인하대 이본수 총장은 최근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우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다음에 인하대를 찾을 때는 교내에 우뚝 선 이승만 동상을 보게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