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불고 있는 글로벌 인수합병(M&A) 바람이 지난 10년 동안 잠잠하던 명품업계까지 번졌다.
‘명품왕국'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는 지난 23일(이하 현지시각) ‘명품 중의 명품'으로 불리는 프랑스 최고급 브랜드 에르메스(Hermes)의 지분 17.1%를 취득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파리 증시는 5% 이상 지분을 가진 주주의 보유내역을 공개토록 하고 있고, 이에 따라 LVMH도 에르메스 지분 내역을 공개했다.
명품 사업 분야의 인수합병 활동은 10년 전부터 거의 전무한 상태다. LVMH는 지난 1999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에 대한 적대적 인수에 나섰지만 결국 프랑스유통그룹 PPR에 밀려 패한 바 있다.
현재 LVMH가 보유하고 있는 에르메스 지분의 시장 가치는 14억5000만유로(약2조2639억원)에 달한다. LVMH가 어떤 방법으로 소문을 내지 않고 에르메스 지분을 취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LVMH는 파생상품을 활용해 에르메스 지분을 매입했다고 설명했다. LVMH는 에르메스 주식을 주당 80.5유로에 매입했다. 이는 에르메스의 지난 22일 종가 176.2유로보다 54%나 싼 가격이다. 에르메스 주식은 지난 2년간 주당 70~110유로 선에서 거래됐지만, 올해 초 장 루이 뒤마 최고경영자(CEO)가 사망한 후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이 흘러나오면서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했다.
LVMH는 이날 성명을 내고 에르메스에 대한 공개매수를 하지 않겠다며, 이사 선임 요구 등 경영권에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에르메스의 전략과 경영 방식도 지지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LVMH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LVMH가 최종적으로 에르메스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샌포드 번스타인의 명품 담당 애널리스트 루카 솔카는 “LVMH의 지분 인수는 장래 에르메스 인수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지난 2년 동안 에르메스를 치켜세우며 간접적인 인수 의사를 내비쳤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LVMH는 스스로를 전 세계 명품업계 흐름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부른다”며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명품 브랜드로 칭송받는 에르메스의 지분을 포트폴리오에 넣는 일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LVMH가 에르메스 인수에 성공하려면 에르메스 지분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창업주 일가를 설득해야 한다. 에르메스에 따르면 전체 가족 구성원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거의 75%에 달한다. 에르메스는 LVMH의 자사 지분 확보 소식이 전해지자 대주주들은 지분을 팔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지난 5월 에르메스 창업자의 후손이였던 장 루이 뒤마 CEO가 사망하자 창업주 가족 일부가 에르메스 지분을 내다팔 수 있다는 소문은 꾸준히 돌았다. 뒤마의 죽음으로 가족 구성원의 충성심은 시험대에 올랐다. 창업주 일가 가운데 200명이 넘는 구성원들은 자체적으로 체결한 2가지 협약을 바탕으로 에르메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에르메스 지분의 58.36%를 갖고 있으며 관련 협약은 오는 12월과 5월에 각각 갱신될 예정이다.
창업주 일가가 마음을 바꿔 에르메스 지분을 팔아도 LVMH의 에르메스 인수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에르메스는 영업이익률이 27% 안팎인 ’알짜‘ 물건이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 최근 주가가 빠르게 오른 덕분에 에르메스의 시가 총액은 210억유로에 달한다. LVMH의 3배가 넘는 금액이다. 반면 LVMH의 순채무는 27억유로로 회사가 연간 벌어들이는 EBITDA(법인세·이자·감가상각비 차감전 이익)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에 따라 LVMH가 에르메스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현재 갖고 있는 모엣 헤네시의 지분 66%를 영국 주류업체 디아지오(Diageo)에 매각할 수 있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LVMH와 에르메스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업체지만 너무나도 다른 기업 문화를 갖고 있다. 루이비통과 크리스찬 디올로 유명한 LVMH는 대중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에르메스는 좀 더 고급 계층에 집중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르메스는 173년 전 말 안장을 만드는 업체로 출발했다. 에르메스는 창업주 일가를 중심으로 조합 형태의 경영체제를 유지, 오랫동안 지독하게 회사의 독립성을 보존했다. 에르메스는 시즌마다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는 패션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상품들을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타조나 악어 등 이국적인 동물 가죽을 일일이 손으로 꿰매 만든 에르메스의 가방을 사기 위해서는 대기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2년을 기다려야 한다.
LVMH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중적인 명품업체다. LVMH의 공격적인 경영전략은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유명하지만 논란이 될만한 디자이너를 크리에티브 디렉터로 임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LVMH는 존 갈리아노를 크리스찬 디올로, 마크 제이콥스를 루이비통으로, 리카르도 티시를 지방시에 스카웃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샤를리즈 테론 같은 유명 인사들은 LVMH 산하 브랜드의 화려한 패션쇼에 모습을 드러낸다.
에르메스도 지난 2003년 기성복을 출시하며 패션쇼를 열기 시작했지만, 많은 이목을 끌지 않도록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다. 에르메스의 실크 스카프 광고에 루이비통과 일한 경험이 있는 헐리우드 스타 제니퍼 로페즈를 쓰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지난 여름 세계적인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가 에르메스 여성복 아티스트 디렉터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자로 임명된 크리스토프 르메르는 패션업계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사람이었다. 패션 흐름보다는 에르메스의 핵심 제품에 집중하려는 회사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LVMH가 에르메스를 인수하면 에르메스 고유의 가치가 흐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샌포드 번스타인의 명품 담당 애널리스트 루카 솔카는 “LVMH가 에르메스를 인수하면 에르메스의 고전미가 덜 드러나고 헐리우드 성향이 더 드러난 상품이 에르메스 진열장을 차지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