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한국에 중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국 군사고문을 파견하여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력하에 두려고 계획했던 사실이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신라대학 배경한 교수(사학과)는 최근 공개된 1940년대 초 중화민국 외교부 당안(외교문서)을 분석하여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배 교수는 '중일전쟁 시기 장개석·국민정부의 대한정책'이란 논문을 12월 말 역사학보에 실을 예정이다.
논문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 이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1944년 9월 중경(重慶) 주재 미국·영국대사와 전후(戰後) 한국문제 처리와 관련된 협의를 갖고 '한국문제연구요강초안(韓國問題硏究綱要草案)'을 작성했다. 이어 그해 10월 국민정부는 이 초안과 관련한 자국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군령부, 경제부, 재정부 등에 공문을 보내 의견수렴에 나섰다.
이때 군령부는 ▲종전과 함께 진행될 연합국측의 한반도 군대 파견 시 중국군도 함께 파견한다 ▲한강 이남은 영국·미국군이, 한강 이북은 중국군이 진주한다 ▲군대의 수는 중국군이 4, 영·미군이 각각 1의 비율로 한다 ▲새로 창설될 한국군은 중국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한국광복군을 중심으로 한다 등의 입장을 정리했다. 군령부는 이어 '소련의 대일 참전 시에도 중국군 중심의 한반도 진공작전은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당시 영국 주재 중국대사이던 고유균(顧維鈞)은 외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일본군의 항복 후 동맹군이 진공하여 한인단체, 영도자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를 구성할 때 임정의 외교·국방·경찰부문에는 3년 기한으로 중국인 고문을 두고 재정·교통부문에는 미국 고문, 위생부문에는 소련 고문을 두어 한국의 임정시기 외교 국방을 우리(중국)가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국민정부의 이 같은 전후 한반도 구상은 일본 패망 후 북위 38도를 경계로 한 미·소의 분할점령으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그 이후(1945년 12월)에도 '한국문제의 대책(韓國問題之對策)'이란 보고서를 통해 친중 인물(親中分子)을 한국 권력에 심고 우수한 청년들을 중국에 유학시켜 한국의 간부로 육성키로 하는 등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정책을 멈추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배 교수는 "중국인들의 이러한 한반도 정책은 청(淸)조나 국민정부, 공산당 정부 등 세대와 정부를 뛰어넘어 이어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며 "최근 중국의 '거친 외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입력 2010.12.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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